강자평(姜子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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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0년(세종12)~1486년(성종17) = 57세]. 조선 초기 세조(世祖)~성종(成宗) 때 활동한 문신. 자(字)는 국균(國鈞)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공조(工曹)참판(參判)강회중(姜淮仲)의 증손자이며, 종실(宗室) 의성군(誼城君)이심(李宷)의 사위이다.

세조~예종 시대의 활동

1455년(세조1) 음보(蔭補)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훈되었다. 1457년(세조3)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1459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좌필선(左弼善)이 되어 좌중호(左中護)를 겸임하였는데, 이 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3년상을 마치자, 통례문(通禮門)부지사(副知事)에 임명되었고, 종친부(宗親府)전첨(典籤),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번 옮겨 종부시(宗簿寺)정(正)에 이르렀다. 1466년(세조12) 승정원(承政院)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뒤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가, 1469년(예종1)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성종 시대 활동

1470년(성종1) 권맹희(權孟禧)가 귀성군(龜城君)이준(李浚)을 국왕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말하였는데, 옆에서 이것을 듣고도 고변하지 않았다고 하여,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어 국문을 받고 진해(鎭海)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서 고신(告身)을 되돌려 받았다.

1475년(성종6) 성주목사(星州牧使)와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나갔다가, 형조참의, 대사간을 거쳐 우부승지,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 형조참의로 옮겼다가 1485년(성종16)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 1486년(성종17)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고 병으로 전라도관찰사의 별관(別館)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57세였다

묘소와 사후의 피화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북쪽 용보원(龍步院)의 언덕에 있는데, 이숙함(李淑瑊)이 쓴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1482년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곧 제헌왕후齊獻王后)를 폐출할 당시 승지(承旨)였던 강자평은 인수대비(仁壽大妃)의 ‘윤비를 폐출하라는 교지’를 윤비에게 보여주었다고 추죄(追罪)당하였다. 이에 강자평의 직첩은 몰수되고, 과거에 급제한 아들 강형(姜詗), 강집(姜諿), 강겸(姜謙) 3형제가 처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에 직첩을 되돌려 받고 신원(伸寃)되었으며, 좌찬성(左贊成) 겸(兼) 홍문관(弘文館)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朝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사가집(四佳集)』
  • 『용재총화(慵齋叢話)』
  • 『추강집(秋江集)』
  • 『삼탄집(三灘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