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열군관(左列軍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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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진무영(鎭撫營)의 장려(壯旅)와 의려(義旅)에 설치되어 강화도 방어를 담당한 군관.

개설

좌열군관은 1681년(숙종 7) 강화유수이선(李選)이 강화도의 방어를 맡기기 위해 진무영에 설치하였다. 좌열군관은 1694~1696년에 편찬된 『강도지(江都志)』에 의하면 500명이 설치되었고, 강화도 덕진(德津)돈대를 파수(把守)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1708년 의려대(義旅隊)와 장려대(壯旅隊)가 만들어지면서 좌열군관은 크게 증가하여 1779년(정조 3)에는 장려와 의려에 각각 999명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으로 진무영이 폐지되면서 좌열군관도 혁파되었다.

담당 직무

『강도지』에 의하면 좌열군관은 덕진돈대를 파수하였고, 1708년(숙종 34) 의려대와 장려대가 편성된 후 좌열군관이 되는 좌학의려(左學義旅)도 적북(赤北)·낙성(樂成)·숙룡(宿龍)돈대를 파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아울러 1797년(정조 21) 정조가 장릉(章陵)을 참배할 때 진무영의 장려 1초(哨)와 의려 1초에게 척후(斥候)와 복병(伏兵)을 시켰다는 점에서(『정조실록』 21년 8월 7일), 좌열군관이 왕의 행차에서 호위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초는 약 100명을 단위로 하는 군대 편제였다.

변천

1681년 강화유수이선은 강화도의 방어를 맡기기 위해 좌열군관을 우열군관(右列軍官)과 함께 진무영에 설치하였다(『정조실록』 3년 3월 8일). 좌열군관은 『강도지』에 의하면 500명이 설치되었는데, 1708년 교생(校生)과 원생(院生)을 의려대에, 그리고 장교(將校)를 장려대에 편성하면서 좌열군관의 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좌열군관은 1779년에는 장려와 의려에 각각 999명이나 배치되어 우열군관과 마찬가지로 진무영에서 군액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무학(武學)속오군(束伍軍)으로 각각 1,332명이었다. 하지만 1895년 을미개혁으로 진무영이 폐지되면서 좌열군관도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도지(江都志)』
  •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 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1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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