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락궁(長樂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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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한(前漢)의 태후(太后) 궁전인데, 조선시대에 대비(大妃)를 칭하는 상징어로 쓰인 말.

개설

조선시대에는 대비를 지칭하여 ‘동조(東朝)’, ‘장락궁(長樂宮)’, ‘자전(慈殿)’, ‘자후(慈候)’, ‘자위(慈闈)’ 등이라 했고, 대비의 처소를 ‘동궁(東宮)’, ‘동전(東殿)’이라 하기도 했다. 대비는 세자와 마찬가지로 동쪽 영역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궁궐 제도의 일반적 원칙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비를 칭하는 상징어 가운데 가장 많이 쓰였던 것이 ‘동조’이고 다음이 ‘장락궁’이었다. 대체로 동조와 장락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대비의 존재감이나 정치적 위상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때이다. 성종 시기 대비를 위한 궁궐로 창경궁을 지으면서 장락궁과 동조를 언급하고 있다. 조선이 중국 전한 시대의 미앙궁(未央宮)과 장락궁을 본떠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성하고 그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변천 및 현황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문헌을 보면 ‘동조’의 어원은 한나라에서 시작되었고 한나라의 궁궐 ‘장락궁’에서 기원한 말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기원전 200년, 중국 한(漢)나라 고조 7년 10월, 진나라의 별궁이던 ‘흥락궁’ 터에는 진나라를 점령한 한나라의 궁궐 ‘장락궁’이 세워졌다. 조나라와 낙양을 경유하여 장안에 도착한 한의 고조와 모든 관료들은 장락궁에서 정무의 수행을 시작했다. 이때, 고조의 후비는 여후로 장락궁 안의 장신궁을 거처로 삼고 있었다. 고조는 건국 초기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며 궁을 떠나 있었다. 고조가 반군을 토벌하고 돌아왔을 때, 승상(丞相)소하(蕭何)는 동궐·북궐·전전·무고·태창 등으로 화려하고 장대하게 꾸민 미앙궁을 장락궁의 서쪽에 건립해 두었다.

이렇게 하여 전한의 도읍 장안에는 동·서 두 개의 궁궐이 놓이게 되었고 동쪽의 장락궁, 서쪽의 미앙궁으로 나누어 궁궐을 운영하게 되었다. 기원전 195년(한 고조 12) 4월, 고조가 장락궁에서 서거하자 태자로 있던 여태후(呂太后)의 아들이 즉위하여 효혜황제(孝惠皇帝)가 되었다. 이때 여태후는 장락궁에 머물면서 효혜황제의 문안을 받으며 정사에 관여하였다. 심지어 효혜황제 붕어 후, 스스로 여제라 칭하며 작위를 베풀고 책봉하는 일에 전권을 휘두르는 등 태후는 장락궁에 머물면서 천하를 호령하였다. 이후부터 대부분의 태후들은 장락궁에 머물렀고, 세상 사람들은 장락궁을 동조라 하였다. 때문에 조정에 관여하는 태후가 있을 때 동조라 칭하였다.

조선의 조정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정치를 금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대비를 이용해 왕실 왕권을 보호하고 왕의 독단을 견제한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왕실의 가장 웃어른인 대비의 정치적 참여를 허용했다. 실제로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성종의 수렴청정을 시도하였고 섭정을 거둠과 동시에 대비전으로서 창경궁을 계획하였다. 당시까지는 대비전 건축에 관한 특별한 범례가 없었기 때문에 대비전의 상징인 장락궁을 기준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창경궁을 계획할 때 궁궐을 동향하도록 설정한 것은 장락궁의 동향과 관계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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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1667년(현종 8) 경덕궁에 있던 집희전을 옮겨 집상전을 짓도록 명했다(『현종실록』 8년 11월 11일). 그때 인조의 계비로 왕대비 자리에 있던 자의대비(慈懿大妃)와 효종의 왕후이던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왕실 웃전에 있었다. 현종은 자의대비가 거처하였던 만수전 동편에 전각 하나를 건립하여 인선대비를 모셨다. 그러면서 마치 한나라 때의 장락궁과 장신궁 같은 제도를 본뜬 것이라며 대비전을 건설한 제도적 모범을 장락궁에 빗대었다. 장락궁, 장신궁이라는 전각의 이름을 그대로 따오지는 않았지만, 대비전을 짓는 계획안에는 그 상징적 의미를 따랐던 것이다.

이렇게 전각을 조성하는 제도뿐만 아니라 동조, 장락궁, 장신궁은 은유적 상징으로써 점점 대비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도 자리 잡았다. 조선이 일컫는 동조, 장락궁은 궁궐 여성 공간의 대표 영역으로써 건축물의 배치, 방향과 같은 물리적 특성뿐만 아니라 왕실 웃전으로서의 위계, 정치, 사상 등 대비에 관한 영역을 나타내는 모든 상징성으로 대변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17~18세기 이후, 창덕궁·창경궁 안에서 새롭게 조성되어 나갈 대비의 전각에 명분을 제공하였고 많은 새로운 대비전을 창건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장락궁이라 일컬은 동궐 내의 전각은 창경궁 외에도 수정전, 만수전, 경복전, 집상전, 자경전 등으로 순전히 대비를 위해 지은 전각들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계곡집(谿谷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문선(東文選)』
  • 『목은집(牧隱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홍재전서(弘齋全書)』
  •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연구: 17~18세기 동궐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 徐怡濤 編著·汝信 主編, 『中國建築藝術史』上卷, 寧夏人民出版社,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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