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鄭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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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0년(성종 21)~? = ?]. 조선 전기 중종(中宗) 때의 문신. 은일(隱逸). 종부시(宗簿寺)부정(副正)을 지냈다. 자는 대명(大鳴)이고, 호는 괴은(乖隱)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무안현감(務安縣監)정유의(鄭有義)이고, 어머니 양주 조씨(楊州趙氏) 혹은 임천 조씨(林川趙氏)는 조찬(趙瓚)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청주목사(淸州牧使)을 지낸 정결(鄭潔)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정자순(鄭子順)이다.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에 속하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참화(慘禍)를 당한 정희등(鄭希登)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중종 시대 활동

1501년(연산군 7)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12세였다.[『방목(榜目)』] 1510년(중종 5)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방목』] 그해 1월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거둥하여 정구(鄭球) 등 3인을 시강(試講)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5년 1월 15일] 처음으로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선발되었고,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중종실록』중종 7년 윤5월 1일, 중종 8년 1월 20일, 『용주유고(龍洲遺稿)』 권14 「괴은정선생묘지(乖隱鄭先生墓誌)」 이하 「정구묘지명」으로 약칭] 1516년(중종 11)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는데, 그는 조광조의 사림파가 되어 훈구파(勳舊波)와 대립하였다.[『중종실록』중종 11년 7월 6일] 병조 낭관(郎官)이 되었으나, 권력을 잡은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단천군수(端川郡守)로 좌천되었다.[「정구묘지명」]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사림파로 지목되어 파직당하고, 집안에 은거하며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1528년(중종 23) 7월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에 발탁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에서 “재상경차관은 어사(御史)의 직함으로 여러 도(道)에 보내므로 그의 소임이 지극히 중하여 다른 사명(使命)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면 한갓 소임만 감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손해와 오욕(汚辱)을 가져오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정구·이희(李熹)·최호(崔灝) 등은 사명에 합당하지 못하니, 개차(改差)하기 바랍니다.”라며 반대하였다. 이에 중종은 “재상경차관도 폐단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어사의 직함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는 추생어사(抽栍御史)가 수령들을 규찰하는 예와 같은 것이 아닌데, 정구 등이 문신(文臣)으로서 이 소임을 감당가지 못하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중종실록』중종 23년 7월 19일] 그러나 정구 본인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벼슬이 종부시(宗簿寺)첨정(僉正)부정(副正)에 이르렀다.[『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 『용주유고』 권15 「장령정공묘갈(掌令鄭公墓碣)」] 그가 돌아간 연대는 미상이지만,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 이전은 분명하다. 이때 그의 아들 정희등이 연달아 세 차례나 심문을 받으면서 곤장을 맞은 후, 용천(龍川)으로 귀양 가다가 죽는 바람에 시신을 집으로 운구(運柩)하여 장사지냈는데, 이미 그 아버지는 없었다.

정구의 시문과 유고(遺稿)를 모아서 문집을 편찬한 『괴은집(乖隱集)』 4권이 남아 있다.[「정구묘지명」]

성품과 일화

정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덕성(德性)은 내실(內實)에 힘쓰고 부화(浮華)를 싫어하였고, 겉으로는 순종하였으나 안으로는 방정(方正)하였으며, 영예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서 요인(要人)들과 교제하지 않았다. 예문관에 재직할 때에 사필(史筆)을 손에 잡고서 정사당(政事堂)에 앉아 있었는데, 대체로 이렇게 하는 것이 고사(故事)였으나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던 것이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을 시행하자,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눈을 흘겨보고 그를 미워하였다. 뒷날에 그가 외직으로 좌천당한 것도 이 일 때문이었다.[「정구묘지명」]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화(禍)를 당한 뒤로부터 대문을 닫아걸고 다리에 병이 들었다고 핑계를 대며 자리에 앉아서 지내기를 18년 동안이나 하였다. 대문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1537년(중종 32) 아들 정희등이 아내를 맞이할 때 신부가 예견(禮見)하는 날 기뻐하여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집안사람들도 그때서야 그가 거짓으로 앉은뱅이 행세를 하였던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평생 동안 집안 형편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물어보지 않았고 오로지 문묵(文墨)을 즐기는 것으로써 자기 즐거움으로 삼았다.[『정문익공유고』, 『용주유고』 권15 「장령정공묘갈」] 아들 정희등 또한 아버지의 절개를 이어받아 절개를 지키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묘소와 후손

용주(龍洲)조경(趙絅)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정구묘지명」]

부인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사지(司紙)김중문(金仲文)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정희등은 사헌부 장령인데,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윤원형(尹元衡)의 소윤 일파가 대간(臺諫)에서 윤임(尹任)대윤(大尹) 일파 3대신을 탄핵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다가, 죽음을 당한 현사(賢士)이다. 차남 정희승(鄭希昇)은 일찍 죽었다. 장녀는 첨지(僉知)조수곤(趙壽昆)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학생(學生) 유유정(柳惟精)에게 시집갔다.[「정구묘지명」] 사위 조수곤이 바로 인조(仁祖) 대에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고, 숙종(肅宗) 대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조경의 할아버지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괴은유고(乖隱遺稿)』
  • 『용주유고(龍洲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