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월(郭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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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8(중종13)~1586년(선조19) = 69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 활동한 문신(文臣). 자는 시정(時靜)이고, 호는 정재(定齋), 정암(定菴)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인데, 경상도 창녕(昌寧) 출신이다.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곽지번(郭之藩)의 아들이고,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의 아버지이다.

명종 시대 활동

여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외조부 허린(許磷)이 데려다가 키우면서 글을 가르쳤다. 1556년(명종11)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64년(명종19)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나갔다. 1566년(명종21) 영천군수(榮川郡守)로 옮겼는데, 영천 고을에 조세(租稅)를 포흠(逋欠)한 곡식이 1만 석(石)이 넘었다. 그러자 곽월은 관련 문권(文券)을 불태워버리고 모곡(耗穀)으로 대신 채우게 하니, 아전과 주민들이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고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4년 뒤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 경상도 현풍으로 돌아갔다.

선조 시대 활동

1573년(선조6)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장령(掌令),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1574년(선조7)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나갔는데, 의주 주민들이 교화(敎化)를 알지 못하자, 학교를 세워서 고을의 젊은이들을 정성스레 가르치니, 주민들이 흥학비(興學碑)를 세웠다. 1577년(선조10) 호조참의에 임명되었고, 1578년(선조11)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1581년(선조14)에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너무 늙어서 바다를 건너기가 어렵다고 하여 청송부사(靑松府使)로 바꾸어 임명되었다. 1585년(선조18)에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재임하다가 전라도감사와 사이가 나빠져 파직당하여, 고향 현풍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병으로 죽으니, 향년 69세였다.

성품과 일화

곽월의 인물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생긴 모습이 훤칠하고 눈빛이 번쩍번쩍 빛나서 사람들이 저절로 위엄에 눌려 두려워하였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척척 잘 처리하였는데, 분석하고 결단하기를 거침없이 하였으며, 일을 하는 데에 통상적인 전철을 밟지 않았다. 특히 활쏘기를 잘하여 공청(公廳)에서 물러나오면 번번이 과녁을 세우고 여러 아들들과 정곡(正鵠)을 맞히는 시합을 벌였는데, 그가 쏘면 명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문무(文武)의 인재’라고 칭송하였고, 국가에서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 큰일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라 기대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김해(金海) 구지산(仇知山) 신당리(神堂里) 선영(先塋)에 있는데, 김세렴(金世濂)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학봉전집(鶴峯全集)』
  • 『난중잡록(亂中雜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석담일기(石潭日記)』
  • 『순암집(順菴集)』
  • 『우계집(牛溪集)』
  • 『잠곡유고(潛谷遺稿)』
  • 『점필재집(佔畢齎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