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朴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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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71년(현종 12) = ?].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무신. 삼수군수(三水郡守)와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등을 지냈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홍명구(洪命耈)의 군관으로 금화(金化)에서 청(淸)나라 군사와 싸웠다. 이 때 홍명구가 전사하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손수 그의 시신을 거두었는데, 이로 인해 효종(孝宗)의 딸인 숙안공주(淑安公主)의 부마이자 홍명구의 손자인 익평위(益平尉)홍득기(洪得箕)의 집안과 은정이 몹시 두터웠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5년 7월 19일] 1644년(인조 22) 5월 무사(武士) 허수(許遂) · 김유(金瑜) · 권주(權霌)와 함께 청나라 심양(瀋陽)에 가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행차 때 세자를 모시고 호위하는 데 진력하였다.[『인조실록』인조 22년 5월 7일]

1656년(효종 7) 삼수군수로 있을 때 성(城)을 쌓았으며, 1661년(현종 2) 2월에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가 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7년 1월 8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2년 2월 23일] 이 때 불법 축재를 하였는데, 1664년(현종 5) 체직될 당시 사형죄에 해당하는 장오죄를 여러 번 범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의금부에 갇혀 있다가 사형을 선도 받았다.[『현종실록』현종 5년 윤6월 8일, 현종 6년 2월 8일, 현종 6년 11월 3일, 현종 6년 11월 4일, 현종 6년 11월 6일] 그러나 심양에서 세운 공로와 홍명구의 군관으로 있을 때에 대장에게 충성한 상황 등이 고려되면서 사형에서 감해져서 먼 변방으로 정배되었다가 그 뒤 아산(牙山)으로 이배되었다.[『현종개수실록』현종 7년 8월 10일] 그러나 그는 유배지에서도 계속하여 문제가 되었다. 유배지를 떠나 안성(安城)에 오래 있으면서 전장(田庄)을 장만하고 집을 지었으며 주민을 부렸던 것이다. 1671년(현종 12) 7월 이러한 방자한 행동으로 심한 탄핵을 받던 중, 마침 유배지에서 돌아갔으므로 벌을 받지 않았다.[『현종실록』현종 12년 7월 27일]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순암집(順菴集)』
  • 『청음집(淸陰集)』
  • 『국조보감(國朝寶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