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형(朴元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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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1년(태종 11)~1469년(예종 1) = 59세]. 조선 초기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지구(之衢)이고, 호는 만절당(晩節堂)이다. 행직(行職)은 영의정(領議政)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인데, 아버지는 병조 참의(參議)를 지낸 박고(朴翶)이고, 어머니 양성이씨(陽城李氏)는 사복시(司僕寺)판사(判事)이한(李瀚)의 딸이다. 조부는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박영충(朴永忠)이다.

세종 시대의 활동

1432년(세종 14)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였다. 그때 명유(名儒) 권채(權採)대사성(大司成)이었는데, 그를 보고 그릇으로 여기어 『강목(綱目)』·『통감(通鑑)』·『송원파방(宋元播芳)』·『두시(杜詩)』를 주니, 성균관의 유생(儒生)들이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1434년(세종 16) 봄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에서 3등으로 합격하여 계공랑(啓功郞)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에 임명되었고, 그 뒤 여러 차례 전직되어 선교랑(宣敎郞)도염서(都染署) 영(令)에 이르렀다. 1436년(세종 18)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아우 박원정(朴元貞)과 같이 3년간 시묘 살이를 하였다. 1438년(세종 20) 6월에 상복(喪服)을 벗자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1439년(세종 21)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 연경(燕京)에 갔는데, 사신 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청렴과 정직에 감탄하였다. 1440년(세종 22)에 승훈랑(承訓郞)이 되고, 1443년(세종 25)에 승의랑(承議郞)으로 승진하여 사복시 판관(判官)이 되었다. 1445년(세종 27)에 이조 정랑(政郞)으로 전직되었는데, 임금이 마정(馬政)을 중히 여겨 다시 사복시 판관으로 임명되고, 봉훈랑(奉訓郞)으로 승진되었다. 1447년(세종 27)에 봉직랑(奉直郞)으로 승진하여 사복시 소윤(少尹),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고 재차 승진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이르렀다.

문종 · 단종 · 세조 · 예종 시대의 활동

1451년(문종 1)에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승진되어 사복시 윤(尹)이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에 위의장군(威毅將軍)대호군(大護軍), 사간원(司諫院)지사(知事)가 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직대부(中直大夫)로 승진하여 사복시 수판사(守判事)가 되었다. 이 해 10월에 세조(世祖)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다음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전직되어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도록 모두 형조 지사를 겸임하였다.

1455년(세조 1) 6월에 세조가 왕위(王位)를 이양 받을 때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세조 2) 10월에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올라 이조 참판(參判)·세자빈객(世子賓客)·연성군(延城君)이 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여 호조 판서(判書)가 되었는데, 이때 명나라 사신 진감(陳鑑)과 고윤(高潤)의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이 해 형조 판서가 되었다. 1458년(세조 4)에 함길도 도순찰사(咸吉道都巡察使)로 나가서 부령진(富寧鎭)을 설치하여 국방을 견고하게 하였다. 1459년(세조 5)에 우리나라가 야인에게 관작(官爵)을 주었다는 이유로 힐책(詰責)하기 위하여 온 명나라 사신 진가유(陳嘉猷)의 원접사가 되었으며 이어 주문사(奏聞使)겸사은사(兼謝恩使)로 연경에 다녀왔고,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다. 1460년(세조 6)에 또 야인에 관한 일로 명나라에서 장녕(張寧)과 무충(武忠)을 파견하였을 때에도 원접사가 되었고,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462년(세조 8)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1463년(세조 9)에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그때 새로 설치한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였다. 1464년(세조 10)에 명나라에서 김식(金湜)과 장성(張珹)이 왔을 때 접반사가 되었고, 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되어 예조 판서를 겸임하였다.

1465년(세조 11)에 성균관 지사가 되었고, 1466년(세조 12)에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였는데, 모두 찬성을 겸임하였다. 이 해 4월에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세자부(世子傅)가 되었다. 10월에 조정에서 그를 연성군(延城君)으로 고쳐 봉하고 예조 판서를 겸임시켰다. 1467년(세조 13) 여름에 함길도(咸吉道)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나자 함길도 존무사(咸吉道存撫使)가 되어 함길도에 가서 백성을 위무하였다. 1468년(세조 14) 3월에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예조 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해에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승정원에 나아가서 서무(庶務)를 의결하였는데,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 해에 영의정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1월 22일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원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크고 중후(重厚)하여, 평생 동안 말을 빨리하고 얼굴에 당황하는 빛을 띤 적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하고 의심스런 것을 해결함에 의연(毅然)히 정도(正道)를 지켜서, 매번 군의(群議)가 각각의 의견을 고집할 때마다 천천히 한 마디 말로써 이를 결정하되, 행동이 사의(事宜)에 합당하였다. 또 사명(辭命)을 잘하여 명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게 되면, 반드시 빈상(儐相)이 되었는데, 그 의관(儀觀)이 매우 법도가 있었다. 그는 남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뜻을 잘 맞추고, 세상과 더불어 높낮이를 맞추었다. 성격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매양 관아에 나아갈 적에는 비록 바쁜 때라 하더라도 반드시 의복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먼지나 더러운 것을 털어 버리고서야 나갔다.

박원형의 나이 4살 때에 유모가 이웃집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그에게 말하기를, “사나이는 장성하면 반드시 글을 읽어야 하는데, 나는 너를 위해 걱정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사람이 다 글을 읽으면 나도 글을 읽을 것인데, 무슨 걱정을 합니까?”라고 하였으니, 이처럼 총명함이 뛰어났고 영민하였다. 장성하여 취학하자 한번 보면 외웠다. 시문(詩文)으로 명성이 났으며 특히 과거의 글을 잘 지었으므로 지금까지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글을 돌려가며 외워서 규식으로 삼았다 한다.

배향과 행장

시호는 문헌(文憲)이고, 묘소는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에 있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승소(李承召)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부인은 단양우씨(丹陽禹氏)는 군기시 직장(直長)우승경(禹承瓊)의 딸인데, 자녀는 2남 4녀를 두었다. 1남은 박안명(朴安命)이고, 2남은 박안성(朴安性)이다. 1녀는 최옥윤(崔玉潤)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윤효손(尹孝孫)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권은영(權恩榮)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조승정(趙承廷)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동문선(東文選)』
  • 『국조보감(國朝寶鑑)』
  • 『사가집(四佳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동문선(東文選)』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필원잡기( 筆元雜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