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해(朴師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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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11년(숙종 37)~ 1778년(정조 2) = 68세]. 조선 후기 영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참의(參議)이다. 자는 중함(仲涵)이고, 호는 창암(蒼巖)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조부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박태창(朴泰昌)이고, 아버지는 지제교(知製敎)박필기(朴弼琦)이며,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이홍조(李弘肇)의 딸이다. 부인 강릉김씨(江陵金氏)는 김시정(金始炡)의 딸이다.

영조·정조 시대 활동

그는 1750년(영조 26) 사마시(司馬試)에서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1755년(영조 31)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760년(영조 36) 지평(持平)이 되고, 1761년(영조 37) 4월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1762년(영조 38)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수찬(修撰) 등을 역임하고, 1764년(영조 40) 다시 부수찬·교리·지평과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이해 결성 안핵어사(結城按覈御史)가 되어 홍양해(洪量海)의 산송사건(山訟事件)을 해결하였다. 1765년(영조 41) 다시 교리가 되고, 1766년(영조 42)에 태복시 정(太僕寺正)·좌부승지(左副承旨)·우승지(右承旨)·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771년(영조 47)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775년(영조 51)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으나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무사안일하다는 까닭으로 파직되었다가 1776년(정조 즉위)에 복직되어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그림에도 조예가 매우 깊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