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삼길(朴三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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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42년(세종24)~1509년(중종4) = 68세]. 조선 전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동리(東利)이고, 본관은 면천(沔川)이다. 아버지는 박효순(朴孝順)이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성종 시대 활동

1471년(성종2)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474년(성종5)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여러 번 옮겨서 1485년(성종16)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사간원정언(正言)이 되었다가 1488년(성종19) 봉직랑(奉直郞),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이 되었고, 1492년(성종23)에 통덕랑(通德郞), 지평(持平)이 되고, 1493년(성종24) 종4품하 조봉대부(朝奉大夫),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94년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여 폐비윤씨(廢妃尹氏: 제헌왕후齊獻王后)의 일로 추죄(追罪)를 하였으나, 그는 당시 조정의 계청(啓請)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면할 수 있었다. 그가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임명되었을 때, 연산군이 단상(短喪) 제도를 정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고 3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법을 두려워하여 부임하고 심상(心喪)으로 달수를 채웠다. 임기가 만료되어 갈려 가니, 이민(吏民) 남녀가 길을 막고 울부짖었고 나중에는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지냈다. 1504(연산군10)에 사간원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이해 곧 병조(兵曹)참의(參議)가 되었다. 1505년(연산군11)에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연산군의 난정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후배를 가르쳤으므로, 고향 사람 기로(耆老)가 다 선생이라 칭하였다. 1509년(중종4) 11월 9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 68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삼길(朴三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골상이 빼어나고 체구가 크며 마음이 시원하고 밝았다. 젊었을 때에 용력(勇力)이 뛰어나서 송아지를 옆에 끼고 두어 길이 되는 담을 뛰어넘었고, 밧줄을 높이 걸고서 그 위를 달렸다. 달리는 말을 쫓는 것이 사나운 송골매처럼 빨랐고 종일 활을 쏘아도 화살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장수가 될 자질이니 장수가 되어 난(亂)을 막아야 하겠으나, 글을 배우지 않으면 장수가 될 수 없다. 또 이미 사람이 되었으니 행실을 닦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그는 그 가르침에 따라 낮에는 사냥하여 봉양하고 밤에는 날이 새도록 독서하되 천 번을 한도로 하여 읽었다. 그리하여 얼마 안 가서 문리(文理)가 크게 진취하여 경전(經傳)· 자사(子史)에 통달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안락당집(安樂堂集)』
  • 『연경제전집(硏經濟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