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돈(金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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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85년(우왕 11)~1440년(세종 22) = 56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과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 및 전라남도 강진(康津)이다. 아버지는 김칠양(金七陽)이며, 어머니 도강 김씨(道康金氏)는 김용진(金用珍)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참의(參議)를 지낸 김후(金厚)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김승용(金承用)이다. 세종 대 과학이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종 시대 활동

1417년(태종 17)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1420년(세종 2) 집현전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방목(榜目)』],(『세종실록』 2년 3월 16일) 1428년(세종 10) 세종은 김돈에게 『성리대전서(性理大全書)』를 읽게 했고, 이어 김돈은 세종의 명을 받아 역대 왕조의 계보를 정리한『서한이하역대보계도(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만들어 올렸다.(『세종실록』 10년 3월 2일),(『세종실록』 10년 5월 21일) 1430년(세종 12) 김돈은 종학(宗學) 교수(敎授)가 모자라서 가르치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연륜이 있는 2품 이상의 사람 1명을 사표(師表)로 지정하고 3품 이하의 사람 4~5명을 조교로 지정하여 종학 교수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세종실록』 12년 6월 28일) 같은 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니 세종이 윤허하고 장흥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로 임명했다.[『세종실록』 13년 9월 30일 3번재기사],(『세종실록』 13년 10월 27일)

1432년(세종 14) 세종은 김돈과 김조(金銚), 호군(護軍)장영실(蔣英實)에게 명하여 자동으로 작동하는 천문시계인 옥루(玉漏)를 설치할 흠경각(欽敬閣)을 짓도록 명했으며, 1434년(세종 16)에는 지방으로 내려간 김돈을 서울로 다시 불러들여 집현전 직제학으로 삼았다.(『세종실록』 16년 2월 6일) 또한 김돈과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騭)』과 같은 책의 글자를 바탕으로 갑인자(甲寅字)를 만들게 했다.(『세종실록』 16년 7월 2일),(『정조실록』 1년 8월 3일),(『정조실록』 18년 1월 24일),(『정조실록』 20년 3월 17일) 같은 해 김돈은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완성한 후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 설치할 때 그 명(銘)을 지었다.(『세종실록』 16년 10월 2일) 1436년(세종 17) 사신과의 강론 및 제술에 대비하여 성균관(成均館) 가사성(假司成)의 관직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17년 3월 21일) 같은 해 4월 김돈은 나라에 기근이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불교가 백성들을 미혹시켜 재물을 빼앗는 폐단이 심하니 불교를 금지하고 백성들을 진휼하도록 상소했으며, 그해 6월에는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17년 4월 20일),(『세종실록』 17년 6월 9일)

1437년(세종 19) 세종은 집현전에 명하여 태양과 별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측정하는 주야 측후기(晝夜測候器)를 만들게 하고 그 이름을‘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고 했으며 김돈에게는 서(序)와 명(銘)을 짓게 했다. 같은 해 가을 일성정시의가 너무 커서 행군할 때 불편함이 있자 세종은 김돈, 이천(李蕆),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작게 만들게 했다. 이어 24절기를 확정하는 천문 관측대인 간의(簡儀)와 그 부속시설을 수용하는 간의대(簡儀臺) 또한 제작하게 했는데 이 간의대의 기(記) 또한 김돈이 지었다.(『세종실록』 19년 4월 15일),(『세종실록』 22년 11월 11일) 한편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이천(李蕆)으로부터 야인을 소탕할 계책을 전달받은 세종은 승정원 도승지신인손(申引孫)과 김돈을 불러 의정부 찬성(贊成)신개(申槪)의 집에 모여 야인 소탕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논의하게 했다. 이후 이들 세 명은 야인토벌책의 조목을 갖춰 올리고 여기에 세종이 하나를 더하여 이천에게 보내자, 이천은 이를 바탕으로 야인을 토벌했다.(『세종실록』 19년 6월 19일),(『세종실록』 19년 7월 17일),(『세종실록』 19년 7월 19일),(『세종실록』 19년 10월 17일)

1432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흠경각이 1438년(세종 20)에 완성되자, 세종은 김돈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했다.(『세종실록』 20년 1월 7일) 이어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 판서(判書)를 불러 철전(鐵錢)과 미포(米布)를 시행할 방책을 논의하게 했다. 이때 김돈과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이견기(李堅基) 등은 철전을 만들려면 주조할 곳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하는 일이라는 의견을 내세웠다. 대신 포화는 폐단이 없으니 오종포(五綜布)를 쓰도록 허가하고 포화가 자리 잡을 때까지는 동전도 임시로 사용하게 하면서 점차 동전을 사용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세종실록』 20년 2월 14일) 같은 해 김돈은 승정원 좌승지를 거쳐 승정원 도승지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20년 3월 18일),(『세종실록』20년 6월 4일) 얼마 후 의정부 찬성신개가 세종에게 헌릉(獻陵)의 비문에 새겨진 <무인정사(戊寅定社)>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아뢰었다. 이 일로 세종은 김돈을 불러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대신 묻고 상의하게 한 뒤, 귀양 간 이숙번(李叔蕃)에게 물어 비문을 사실대로 고치고자 했다. 이때 이개(李𧪚)는 이숙번이 죄인이므로 도성 밖에 두고 신하가 가서 무인년의 일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세종은 이숙번의 나이가 많고 사안이 중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숙번을 도성 안으로 데려오는 한편 이개더러 직접 보살피게 했다.(『세종실록』 20년 9월 23일),(『세종실록』 20년 12월 7일),(『세종실록』 20년 12월 13일),(『세종실록』 21년 2월 3일)

1439년(세종 21) 김돈과 의정부 우의정허조(許稠) 등이 『선원류부록(璿源類附錄)』을 편수해 세종에게 올렸다.(『세종실록』 21년 2월 5일) 이 시기에 승려 행호(行乎)가 서울 안에 있던 흥천사(興天寺)에 머무르며 불사를 베풀고 있었는데, 이 일로 대신과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행호의 목을 치도록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행호를 벌할 경우 불자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병이 심해질 것을 우려하며 김돈에게 대신과 유생을 타이르고 충돌을 줄일 방책을 찾게 했다. 이에 김돈이 우선 행호를 경기도의 대자암(大慈庵)에 머무르게 하고, 여름이 지나면 원래 있던 산사로 보낼 것을 청하자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21년 4월 18일),(『세종실록』 21년 4월 19일),(『세종실록』 21년 4월 19일),(『세종실록』 21년 4월 21일),(『세종실록』 21년 4월 22일) 이후에도 김돈은 승정원 도승지로서 세종을 대신해 대신들을 만나는 한편 조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세종실록』 21년 5월 3일),(『세종실록』 21년 6월 6일)

1440년(세종 22) 내섬시(內贍寺) 판관(判官)이었던 길사순(吉師舜)이 도망간 비(婢)를 수색한다며 사직(司直)이군실(李君實)의 집으로 쳐들어 가 그의 아내를 구타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일로 길사순은 자신의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운 죄로 관직을 삭탈 당했다가 2년 뒤 돌려받았다. 그런데 이 때 1년이 지나서야 관직에 제수되는 위의색(威儀色) 별좌(別坐)에 제수되자, 김돈은 길사순의 아버지가 절개를 지킨 길재(吉再)인 것을 들어 그 아들을 1년 동안 기다려야 하는 관직에 제수한 것은 옳지 않다고 건의했다. 이에 세종은 길사순을 다른 5품 관직에 제수했다.(『세종실록』 11년 6월 19일),(『세종실록』 13년 5월 19일),(『세종실록』 22년 6월 17일)

그해 여름 병세가 깊어진 김돈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세종은 윤허하지 않고 인수부윤(仁壽府尹)에 제수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돈이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특별히 애도하며 재물을 부의하고 증여했다.(『세종실록』 22년 6월 22일),(『세종실록』 22년 6월 23일),(『세종실록』 22년 9월 16일)

성품과 일화

김돈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성품이 남달리 맑았으며 학문이 세밀하고 깊어, 일찍이 빛나는 명예를 펴서 사림(詞林)에서 뛰어났다. 또한 간의대를 감독하여 만들게 하니 제작이 새로웠고, 승정원 도승지로 뽑아 기밀을 관장하게 하였더니 문서의 출납이 밝고 진실했으며, 나랏일에 힘써 부지런했다.(『세종실록』 22년 11월 11일)

한편 김돈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힘썼는데, 세종이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궁 밖에 있을 때 그의 이름을 듣고 만나길 청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김돈이 과거에 급제하자 세종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내가 경을 보고자 하였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제는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라고 했다.

묘소와 후손

부인 광주 노씨(光州盧氏)은 노상의(盧尙義)의 딸로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김계로(金季老)이다.(『세종실록』 22년 9월 16일)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인재집(寅齋集)』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