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덕(姜碩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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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95(태조4)∼1459(세조5) = 65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 때의 척신(戚臣).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강회백(姜淮伯)의 아들이고, 강희안(姜希顔)강희맹(姜希孟) 형제의 아버지이다. 영의정(領議政)심온(沈溫)의 사위인데, 세종의 손아래 동서이고, 기우자(騎牛子)이행(李行)의 문인이다.

태종 시대 활동

나이 8세(1402년: 태종2)에 아버지가 돌아간 다음에, 외부에 나가서 오랫동안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자 과거를 그만두었다. 이때 안효공(安孝公)심온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음보(蔭補)로 계성전(啓聖殿) 직(直)이 되었다가, 몇 년이 안 되어, 내자시(內資寺)소윤(少尹)으로 옮겼다.

1416년(태종16) 공조(工曹)좌랑(佐郞)으로 있다가 파직당하였는데, 천추사(千秋使)가 중국에 진헌(進獻)한 은쟁반[銀盂] 10개 중에 4개가 가짜인 것이 드러나서 공조(工曹)의 낭관(郎官)들이 모두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종 초년의 수난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중궁(中宮) 친족들은 관직이 올라갔고, 그 장인 심온도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심온(沈溫)에게 자신의 관직 임명을 늦추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1418년 겨울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서 그 일족이 멸망될 때 사위들도 연좌되어 10여 년 동안 유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세종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서, 이후에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득세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주강씨 중에 조선 시대에 출세한 사람들은 그의 후손들이 많았다.

유폐생활 10여 년 동안 문절공(文節公)이행의 문하(門下)에서 여러 서적을 두루 탐구하여 정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세종이 그의 학행(學行)을 알고, 양근군지사(楊根郡知事)로 기용하였는데, 치적이 제일이었다.

궁중 길흉사의 처리

1439년(세종21)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에 임명되어, 이듬해 형조(刑曹)지사(知事)를 겸임하였으며, 1440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그때 세종이 『오례의(五禮儀)』를 제정하면서, 그를 특별히 예조(禮曹)지사로 임명하여, 궁중의 길흉사(吉凶事)에 관한 대례(大禮)를 모두 그에게 위임하였다.

1441년(세종23) 왕세자빈(王世子嬪: 현덕왕후顯德王后)이 단종(端宗)을 낳다가 죽었는데, 세종이 그에게 명하여 현덕빈(顯德嬪: 현덕왕후)의 장사(葬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1443년 좌부승지(左副承旨)에서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호조참판을 거쳐, 1445년 사헌부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다. 1446년(세종28) 3월 세종비(世宗妃)소헌왕후가 돌아가자, 국장도감(國葬都監)·산릉도감(山陵都監)의 두 도감 제조(提調)를 맡았다. 그때 소헌왕후의 지문(誌文)을 썼는데,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뒤 이조(吏曹)와 형조(刑曹)의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

후일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가, “조종조에 강석덕은 과거 출신이 아닌데도 대사성(大司成)대제학(大提學)의 직임까지 맡았다.” 하였으므로, 대사성과 대제학의 문형(文衡)을 역임한 것으로 보이나 실록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개성 아전의 저항 진압

1447년(세종29) 개성유수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그때 개성(開城)의 이속(吏屬)들은 새 왕조에 저항하고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그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세종이 강석덕을 특별히 개성유수에 임명하였다. 그가 개성 관부(官府)에 도착하여, 교활한 이속들을 탐색해내어 그 중에서 불량한 자들을 골라서 관부에서 내쫓아버렸다. 한 달 사이에 세력 있고 교활한 아전들은 금법(禁法)을 무서워하게 되고, 떠돌아다니던 백성들은 모두 본거지로 되돌아왔다. 또 무너진 고려의 전묘(殿廟)와 관청을 다시 수리하였다.

개성에 있는 조선태조(太祖)의 목청전(穆淸殿)의 향관(享官)이 되어 목욕재계(沐浴齋戒)하다가 감기가 들었는데, 오한(惡寒) 증세가 점차 심해지자, 세종이 걱정하여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였다. 1449년(세종31) 세종은 그를 중추원(中樞院) 사(使: 종2품)에 임명하고 서울로 소환하였다. 다음해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문종이 그를 중추원동지사(同知事)와 돈령부(敦寧府)지사(知事)의 한직에 전임시키고, 서교(西郊)의 별장에서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사육신 옥사와 아들 강희안의 연루

1456년(세조2)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 옥사(獄事)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맏아들 강희안도 연루되어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강희안은 고문을 버티면서 자기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세조(世祖)가 성삼문에게 강희안의 관련 여부를 물으니, 성삼문이 “강희안은 실상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관련을 부인하여, 강희안이 살아났다.

그때 병중에 있던 강석덕은 아들을 걱정하여 안절부절 하였다. 그러자 둘째 며느리 안씨(安氏: 강희맹의 처)가 여러 손자들로 하여금 할아버지 강석덕을 좌우에서 모시게 하였는데,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세조가 강희안을 특별히 석방하자, 강석덕은 “너희 모자(母子)를 보고서, 우리 가문이 망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저서로 『완역재집(玩易齋集)』이 남아 있다.

묘소와 유묵

시호는 대민(戴敏)이다. 묘소는 경기도 연천(漣川) 서쪽으로 17리 떨어진 곳에 있다. 둘째 아들 강희맹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 그의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에 따라서 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초서(草書)를 모두 잘 썼는데, 그가 붓을 잡고 쓰면, 정묘(精妙)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시문(詩文)도 고상한 옛 풍취를 살려서 옛 사람들의 법도에 맞지 않으면,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시문이나 필적이 드물게 전한다. 일찍이 세종의 어명으로 소헌왕후의 묘지문(墓誌文)을 썼는데, 그 자획이 정묘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그 글씨를 얻어서 가보(家寶)로 삼았다고 한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사숙재집(私叔齋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경재집(敬齋集)』
  • 『정암집(靜菴集)』
  • 『모재집(慕齋集)』
  • 『인재집(訒齋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기언(記言)』
  • 『약천집(藥泉集)』
  • 『남계집(南溪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