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안(具思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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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3년(중종18)~1562년(명종17) = 40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 활동한 척신(戚臣). 자는 중우(仲愚)이고,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중종의 부마(駙馬)이고, 구사맹(具思孟)의 형이다.

관력과 행적

나이 11세에 중종(中宗)과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셋째 딸 효순공주(孝順公主)와 혼인하여 능원위(綾原尉)에 책봉되었다. 1545년(명종즉위)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자, 위사 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 1등으로 책훈(策勳)되었고, 종1품상 광덕대부(光德大夫)로 승품(陞品)하였다. 1548년(명종3) 윤결(尹潔)·윤준(尹浚) 형제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시말을 기록한 시정기(時政記)를 쓴 안명세(安名世)와 내통하였다고 죽음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능원위구사안이 명류(名流)들과 교제하면서 정법(政法)을 논하다가 그 사실을 알아내어 비밀리 서계(書啓)로써 밀고하였기 때문이었다. 1553년(명종8) 증조부 능천군(綾川君)구수영(具壽永)의 훈봉(勳封)을 승습(承襲)하여 위(尉)군(君)으로 고쳐 능원군(綾原君)으로 봉해졌다. 한편, 효순공주는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기를 낳다가 난산(難産)으로 죽었다. 나라의 제도에 부마(駙馬)는 상처하면 다시 새장가를 못 들게 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국법을 어기고 다시 혼인하였기 때문에 은권(恩眷)을 모두 박탈당하였다.

1562년(명종17) 봄에 갑자기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가 40세였다.

성품과 일화

구사안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성이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성리학의 이론을 즐겨 강론(講論)하였다. 서적을 구입하는 데에는 재화(財貨)를 아끼지 않았고, 평소 서실(書室) 좌우에 책들을 가득 쌓아 두고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다. 재기(才氣)가 있고 또 호탕하며, 사장(詞章)과 문필(文筆)도 모두 뛰어났으나, 부마가 되면서 그 재주와 문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는 활도 잘 쏘았는데, 활의 시위를 알맞게 조절하여 활을 쏘면 반드시 명중하였다. 꽃 피는 아침과 달 밝은 밤이면 친한 벗들을 초청하여 술을 마시면서 흥겹게 시를 노래하였다. 풍양궁(豐壤宮) 뒤에 있는 금대봉(金臺峯) 아래로 수시로 나와 물고기를 잡고 짐승을 사냥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1562년(명종17) 봄에 우연히 병을 얻어 죽게 되었을 때, 여러 아우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마지막 시를 남겼다. 이 시에 “경시(景時)야, 어머니를 잘 모셔라. 나는 저승에서 노닐겠다.[時善母 我遊太淸]”라고 썼는데, ‘시(時)’는 아우 구사맹의 자(字)인 경시(景時)를 가리킨 것이고, ‘선모(善母)’는 어머니를 잘 모시라는 말이다. 그는 재주와 문장이 동생 구사맹보다 뛰어났으나, 부마가 되면서 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술과 풍류로 세월을 보내다가 단명(短命)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건천리(乾川里) 천마산(天磨山) 기슭에 있는데, 송인(宋寅)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기재잡기(寄齋雜記)』
  • 『동각잡기(東閣雜記)』
  • 『부계기문(涪溪記聞)』
  •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