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金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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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2(세조 8) = ?].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형조 참판(參判)과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시호는 희헌(僖憲)이고,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아버지는 김석아(金錫我)이며, 어머니는 고성 이씨(固城李氏)이질(李垤)의 딸이다.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하삼도(下三道) 지역의 축성 사업을 맡았고,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역모 사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후에 경기강원도도순찰사(京畿江原道都巡察使)로서 경기도와 강원도 백성들을 진휼하기도 했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1432년(세종 14)에 생원으로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435년(세종 17)에 집현전(集賢殿) 부수찬(副修撰)으로서 집현전 관원들과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찬집했다. 1443년(세종 25)에는 사간원(司諫院) 우헌납(右獻納)에 제수되었는데, 같은 해 양전(量田)에 대한 정책을 올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하게 토지를 측량하고, 연분 9등 대신 연분 6등으로 나누어 행정 업무의 번잡함을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듬해인 1444년(세종 26)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이어 김순은 그 해에 곡식을 갚을 능력이 되는 사람들에게만 진대(賑貸)를 시행하던 관례를 철폐해 환과고독(鰥寡孤獨) 같은 빈민층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가게 하고, 결부법(結負法)을 회복하며, 뇌물을 받은 판원사(判院事)이순몽(李順蒙)을 처벌해야한다는 건의를 올렸다. 1448년(세종 30) 사헌부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17년 6월 8일),(『세종실록』 25년 7월 4일),(『세종실록』 25년 10월 30일),(『세종실록』 26년 2월 7일),(『세종실록』 26년 5월 8일),(『세종실록』 30년 7월 1일)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으로서 문과 시험 합격자의 정원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해, 현재의 정원에서도 우수한 관원을 뽑기 어려우니 굳이 정원을 늘려 관원을 보충하기보다는 현재 관원들을 겸직시키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같은 해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된 우찬성(右贊成)정분(鄭苯)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이조 정랑(正郞)신영손(辛永孫)과 함께 연변(沿邊) 주현(州縣)의 성터를 살폈다. 이후 축성종사관(築城從事官)이 되어 하삼도 지역의 축성 사업을 전담했다. 1451년(문종 1)에 이조에서 김순은 성균관 학자이기 때문에 축성 사업에 적합하지 않다고 건의했으나, 문종은 김순을 그대로 유임했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7일),(『문종실록』 즉위년 9월 19일),(『문종실록』 1년 2월 21일),(『문종실록』 1년 3월 8일)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경상도에 파견되어 군사를 뽑고, 울산(蔚山), 유포(柳浦) 등지의 성지와 사천성(四川城)을 수축했으며, 1453년(단종 1)에는 거제성(巨濟城)을 축조했다. 당시 종사관으로서 성을 축조하고 5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으면 승진을 시켰는데, 김순도 정이한(鄭而漢), 김승규(金承珪)와 함께 현달(顯達)했다. 같은 해 형조 참의(參議)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인 1454년(단종 2)에는 아직 문종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지만 임금이 왕비를 맞아들인 뒤에 길복(吉服)에 따라야하는지의 여부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좌의정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단상(短喪)을 할 수는 없으니, 왕비를 맞이한 뒤에 마땅히 소복(素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같은 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대간에서 김순의 모친이 영산(靈山)에 살고 있기 때문에 김순의 파견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관찰사의 경우 해당 관리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파견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일 때 김순이 그의 가솔을 이끌고 경상도에 내려가 버리면서, 이 문제는 더욱 큰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의정부에서는 김순을 파견해도 괜찮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결국 김순은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그 관직이 바뀌었다.(『단종실록』 즉위년 8월 1일),(『단종실록』 즉위년 9월 24일),(『단종실록』 1년 8월 6일),(『단종실록』 1년 8월 26일),(『단종실록』 1년 11월 8일),(『단종실록』 2년 1월 21일),(『단종실록』 1년 6월 27일),(『단종실록』 2년 7월 5일),(『단종실록』 2년 8월 5일)

세조 시대 활동

1455년(세조 1)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이후 금성대군이유와 조유례(趙由禮) 등이 역모를 모의했다고 주장하며 그 죄를 청했다. 같은 해 명(明)나라에 하정(賀正)하러 다녀왔고,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로 제수되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세조 2) 중추원 동지사(同知事)에 제수되었는데, 이 때 계조모의 상을 당하자 세조는 기복(起復)을 명했다. 김순은 기복 명령을 철회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세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1457년(세조 3) 형조 참판에 이어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후 <금성대군 역모 사건>이 일어났다. 김순은 세조로부터 특별히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금성대군 및 역모 사건과 관계된 자들을 국문했다. 같은 해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며, 또 세조의 명으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금천(衿川), 인천(仁川) 등지의 땅을 살펴보았고, 이어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자급이 더해졌다. 1458년(세조 4)에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다. (『세조실록』 1년 윤6월 28일),(『세조실록』 1년 8월 24일),(『세조실록』 1년 10월 13일),(『세조실록』 1년 12월 27일),(『세조실록』 3년 1월 25일),(『세조실록』 3년 7월 16일),(『세조실록』 3년 9월 22일),

1459년(세조 5)에는 좌찬성(左贊成) 권남(權擥), 예조 판서(判書)홍윤성(洪允成) 등과 함께 시관(試官)이 되어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았다. 같은 해 경창부윤(慶昌府尹) 겸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가, 곧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 세조는 또 김순을 진휼사(賑恤使)로 삼아 기근으로 유랑민이 많이 발생한 경기도와 강원도에 파견하였으며, 이후 김순은 다시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1460년(세조 6) 김순은 경기강원도도순찰사가 되어 세조의 명을 받아 부패한 관리의 색출, 각도 관찰사들의 진휼 노력 여부, 유민들의 정착 여부, 미결 재판 건수의 확인, 군기 점검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같은 해에 경창부윤(慶昌府尹) 양성지(粱誠之)와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명나라 황제의 칙서에 대해 회주(回奏)했다. 이후 다시 중추원 동지사에 제수되었다가, 1461년(세조 7) 중추원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경상도관찰사의 임기가 끝나 한양으로 돌아온 김순은 경상도에 풍년이 든 사실과 충훈부(忠勳府)의 대납(代納)에 대해 보고했고, 이에 세조는 김순을 크게 칭찬했다.

1461년(세조 8)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홍달손(洪達孫), 우찬성(右贊成)구치관(具致寬), 호조 판서조석문(曹錫文) 등과 함께 사복장(司僕將)이 되었다. 이 해에 야인(野人)의 상경 문제를 두고 의논이 일었는데, 김순은 이조 판서최항(崔恒), 공조 판서윤사윤(尹士昀) 등과 함께 야인의 상경은 명나라에서 엄금하고 있고 야인의 피폐함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 우두머리만 상경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62년(세조 8) 세상을 떠났다.(『세조실록』 5년 2월 15일),(『세조실록』 5년 11월 8일),(『세조실록』 5년 12월 3일),(『세조실록』 5년 12월 22일),(『세조실록』 6년 2월 2일),(『세조실록』 6년 3월 10일),(『세조실록』 6년 6월 9일),(『세조실록』 6년 7월 11일),(『세조실록』 7년 6월 23일),(『세조실록』 7년 8월 18일),(『세조실록』 8년 5월 21일),[『역대요람(歷代要覽)』],[『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 권5]

성품 및 일화

김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종 때에 집현전 수찬(修撰)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해가 돋을 무렵 근정전(勤政殿) 옥상에 구름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있어 세종에게 아뢰었다. 이 얘기를 들은 세종은 재이(災異)일망정 상서로운 일은 아니라며 스스로 반성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세종실록』 18년 윤6월 13일) 김순은 1460년(세조 6)에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 때 서장관(書狀官)김호형(金好衡)은 김순의 첩의 동생이 반인(伴人)으로서 지나치게 많은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이를 조사하려 했다. 하지만 김순은 조사를 못하게 하고 도리어 화를 내며 세조에게 김호형을 무고했다. 결국 형조 좌랑(佐郞)김성원(金性源)이 김호형을 대신했다.(『세조실록』 6년 3월 14일)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역대요람(歷代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