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효신서(紀效新書)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22일 (금) 01:19 판 (XML 가져오기)

이동: 둘러보기, 검색



중국 명나라 장군 척계광(1528∼1587)이 1560년(嘉靖 39) 절강현(浙江縣) 참장(參將)으로 있을 때 왜구(倭寇)를 소탕하기 위하여 편찬한 책.

개설

『기효신서(紀效新書)』는 중국 명나라 장군 척계광(1528~1587)이 1560년(嘉靖 39)에 절강현(浙江縣) 참장(參將)으로 있을 때 왜구(倭寇)를 소탕하기 위하여 편찬한 책이다. 권1 속오편(束伍編)으로부터 권18 치수병편(治水兵編)에 이르기까지 총 1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왜구는 주로 해안선을 따라, 습지가 많은 중국의 절강 지방 등을 노략하였다. 이를 소탕하는 데에는 종래 북방 유목민족을 소탕하기 위하여, 편제된 군제(軍制)와 무기 및 전술이 적합하지 않았다. 왜구의 기습적인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소부대의 운용과 접근전에 적합한 전술을 고안한 내용이 실려 있다.

편찬/발간 경위

중국 명나라 장군 척계광(1528∼1587)은 1555년부터 1566년까지 12년간에 걸쳐, 절강(浙江), 복건(福建), 광동(廣東) 등지에서 백여 회 이상의 왜구와의 전쟁을 연승으로 이끌었으며, 철저한 왜구 소탕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궁시(弓矢), 대봉(大棒), 선창(*槍), 쾌창(快*) 등의 무기를 전면 개량하였으며, 남방의 왜구를 방어할 때에 사용했던 등패(藤牌), 낭선(狼*), 장창(長槍) 등을 좀 더 새롭게 개선하였다. 이후 척계광은 과거에 저술한 18권의 『기효신서』와 『연병실기(練兵實紀)』를 기초로 하여, 1584년에 14권의 『기효신서』를 완성하였다.

『척소보연보기편(戚少保年譜耆編)』에 기록된 『기효신서』의 의미를 보면,‘ 기효(紀效)’는 명확히 효과 있는 방법을 기록한 것이라는 뜻이며, ‘신서(新書)’는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은, 새로운 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군사기술을 체계화한 중국의 ‘10대 병서’ 가운데 하나로 그 판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서지 사항

18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4cm 가로 15.2 cm이며,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권1 속오편(束伍編)으로부터 권18 치수병편(治水兵編)에 이르는 총 18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왜구 토벌 과정에 필요한 군사 훈련법과 방어책, 치군사상(治軍思想)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척계광은 등주인(登州人)의 명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무예를 수련하였다. 1544년(嘉靖 23) 16세 때 부친의 관직을 계승하여, 등주위첨사(登州衛僉事)가 되었다. 1552년 일본 제후의 지지를 얻은 상인, 무사와 선인들이 명 조정에 불만이 있는 명나라 인들을 이용하여, 명의 동남 연해 지역에 대규모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명은 이러한 왜구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척계광을 서도지첨사(署都指僉事)로 임명하여, 산동지역의 왜구 방비를 맡도록 하였다. 1555년에 절강도사첨서(浙江都司僉書)에 전임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영소대참장(寧紹台參將)으로서 영파(寧波), 소흥(紹興), 태주(台州) 등의 광범위한 지역의 왜구 소탕의 중임을 맡았다. 초기의 왜구 소탕은 명군의 장군들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 저조로 인해서 순조롭지 않았다.

왜구는 주로 해안선을 따라 습지가 많은 중국의 절강 지방 등을 노략하였다. 척계광은 여러 번에 걸쳐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였지만, 당시의 군대는 격렬한 싸움을 견뎌낼 능력이 없었고, 또한 잠항(岑港)에서의 전역(戰役) 중 장시간에 걸친 왜구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해임되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직접 신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559년에 그는 광부와 농민 3천여 명을 모집하여 장단 병기를 교대로 사용하는 전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스스로 연구한 진법인 원앙진(鴛鴦陣)을 기본 전투의 대형으로 군대를 편성하여 공격과 방어의 양면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군사의 전면적인 훈련을 실시하였다. 척계광은 훈련 과정 중에 군사 훈련의 조항을 정리한 것을 서적으로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4권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이다.

『기효신서』의 병법은 절강지방에서 나왔다고 하여, 절강병법(浙江兵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명확한 지휘편제와 연대책임을 강조하는 속오법(束伍法)을 채택하고, 조총(鳥銃)ㆍ등패(藤牌)ㆍ낭선(狼筅)ㆍ장창(長槍)ㆍ권법(拳法) 등 다양한 무기와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평양성전투 후였다. 선조는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기효신서』의 전법으로 왜군을 격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 책을 입수하여 그 전법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그 이후 『기효신서』의 속오법과 삼수기법(三手技法)에 따라, 중앙군으로는 훈련도감(訓鍊都監), 지방군으로는 속오군(束伍軍)이 설립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설립된 어영청(御營廳)ㆍ총융청(摠戎廳)ㆍ수어청(守禦廳)ㆍ금위영(禁衛營) 등 중앙군영들도 이에 따라 편제되었다. 조선 전기의 ‘졸(卒) → 오(伍) → 대(隊) → 여(旅), 통(統) → 부(部) →위(衛)’로 이어지는 부대편제는 폐지되고, ‘대 →기(旗) → 초(哨) → 사(司) → 영(營)’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부대편제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병법이 한국의 지형과 실정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되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변용 응용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조총을 중시하면서 군대편제를 더욱 세분화ㆍ다양화하였다. 이렇게 발전시킨 것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등의 병서이다. 이 책의 부대편제 방식은 1894년까지 계속되어오다가, 갑오개혁으로 근대적인 군제가 도입되면서,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기효신서』는 후대 인근국가 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서, 중국에서는 『무비지(武備志)』와 『삼재도회(三才圖會)』 등의 병서에 영향을 미쳤고, 조선에서는 『무예제보(武藝諸譜)』ㆍ『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ㆍ『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 등의 병서에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에서는 『무술조학(武術早學』ㆍ『군법병기(軍法兵記)』ㆍ『병법오의서(兵法奧義書)』 등 병서의 근간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현종(顯宗) 5년(1664)에 김좌명(金佐明)이 척계광의 ‘이승훈본’을 참고로 하여, 조선본 『기효신서』를 재간행 하였다. 이 책은 중국의 『기효신서』를 당시 조선의 상황과 실정에 맞추어 재구성한 서적으로 한국의 병법무예서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 나영일, 「기효신서, 무예제보, 무예도보통지 비교연구」, 『한국체육학회지』 36권 4호, 한국체육학회, 1997.
  • 노영구, 「조선 증간본 《기효신서》의 체제와 내용: 현종 5년 재간행 《기효신서》의 병학사적 의미를 중심으로」, 국방부 연구보고서, 1998.
  • 노영구, 「선조대 기효신서의 보급과 진법 논의」, 국방부 연구보고서, 1997.
  • 박귀순, 「일본의 『병법비전서』와 『기효신서』 『무비지』의 관련 연구」, 『한국체육사학회지』 제13호, 한국체육사학회, 2004.
  • 서치상ㆍ조형래, 「『기효신서』 도입 직후의 새로운 성제(城制) 모색」, 『대한건축학회지』 제24권 제1호ㆍ통권 제231호, 대한건축학회,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