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국도지(海國圖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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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나라 말기의 학자 위원(魏源)이 지은 세계지리서.

개설

『해국도지(海國圖誌)』는 중국 청나라 말기의 학자 위원(魏源)이 지은 세계지리책이다. 이 책의 저자 위원은 청말의 공양학파(公羊學派)의 대표자의 하나로서, 청대 중기에 성행했던 고증학이 고전을 해석하고, 고증에 편중하여 실제성을 상실한 점을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사회ㆍ정치에 활용 가능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學)을 주장하면서, 이 입장에서 『시경』ㆍ『서경』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스스로도 정치의 실천에 참가하며, 아편전쟁(1839~1842)에서는 임칙서(林則徐) 등과 함께 영국군과 싸웠지만, 태평천국(1851~1864)의 운동에는 반대하였다.

이 책은 아편전쟁 후, 자국의 방위(防衛)와 세계의 대세에 대해 기술한 책으로 유명하다. 1822년에 써서 1844년에 간행했으며, 1847년에 다시 60권, 1852년에 100권으로 증보 간행했다. 지도(地圖)와 지지(地誌)로 나누어, 세계 각국의 지리ㆍ역사를 소개하고, 양이(洋夷)를 막기 위해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해외지식의 섭취에 이바지했다.

서지 사항

100권 2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4.3cm 가로14.9cm이며,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19세기 중엽 아편전쟁의 패배로 조공체제에 바탕을 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상황 아래서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서양의 무기나 우수한 제도를 수용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위원은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그가 발간한 『해국도지』의 판본별 특징과 유통은 세계관의 변화 및 지식의 유통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1842년(도광(道光) 22)에 위원은 린저쉬(林則徐)의 부탁으로 그가 번역한 『사주지(四洲志)』를 저본으로 『해국도지』를 50권본으로 출간하였다. 위원은 『해국도지』 발간을 통해, 1차 아편전쟁 이후 민중의 의식을 깨우쳐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과 ‘남경조약(南京條約)’ 체결 이후 다른 서양 국가와 여러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자, 위원은 서양에 대한 지식과 함께 선진적인 무기 제작방법을 알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1847년에 『해국도지』를 증보하여, 60권본으로 재출간하였다. 또 위원은 선교사를 통해, 직접 외국 서적을 입수하고, 동시대 쉬찌위(徐繼畬)가 저술한 『영환지략(瀛環志略)』 내용을 참조하여 100권본 『해국도지』를 저술하였다. 100권본 『해국도지』는 기존의 50권본과 60권본보다 세계 각국의 인문지리에 대한 내용을 확충하는 등 당시 중국의 상황을 고려하여, 필요한 외부지식을 모두 총집한 것이다.

외국에 관련된 지식이 소개된 『해국도지』는 해마다 중국을 다녀온 조선의 연행사(燕行使)를 통해서 조선에 유입되었다. 이 책은 조선에 전래된 이후 일부 지식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해국도지』를 소장하고 열람하여,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여, 서양 국가나 서양의 문물을 소개했다.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입장을 가졌던 윤종의는 벽위신편(闢衛新編)에 『해국도지』를 이용하여 얻은 천주교에 비판적인 문장을 모두 수록하였다. 그러나 윤종의는 『해국도지』의 내용을 의심하여, 서양 국가에 대한 서술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전의 『명사(明史)』를 이용했다.

최한기는 ‘기’의 이론을 주장하면서, 『해국도지』의 서양 국가 서술을 다시 ‘기(氣)’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인용하여, 자기의 ‘지구전요(地球典要)’에 반영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전통적인 지위가 몰락하고, 동시에 조공체제가 붕괴되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연행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던 방식에서 직접 해외를 유력하여, 서양을 경험하고 수용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인 유길준은 일본과 유럽과 미국을 경험하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을 참고하여,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저술하였다. 조선 지식인들이 서양을 직접 경험하면서, 『해국도지』가 선진적인 지식을 담은 책이라는 지위가 깨지면서, 이후 조선 지식인의 세계관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해국도지』는 우리나라에 오경석이 처음 들여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조선의 역관(譯官)ㆍ서화가로서,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ㆍ진재(鎭齋),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지중추부사응현(膺賢)의 아들로서, 33인의 한 사람인 세창(世昌)의 아버지. 중인(中人) 출신으로 역관이 되어 청나라에 왕래하며 신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하여, 이상적(李尙迪)의 문하에서 한어(漢語)와 서화를 공부하였다. 가학(家學)으로 박제가(朴齊家)의 실학을 공부하였다. 1846년(헌종 12) 역과(譯科)에 합격하였다. 1853년(철종 4) 4월 북경행 사신의 역관으로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가서 이듬 해 3월까지 머무르며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중국을 관찰하였다. 그 뒤 13차례나 역관으로 중국을 내왕하면서, 『해국도지(海國圖志)』ㆍ『영환지략(瀛環志略)』ㆍ『박물신편(博物新編)』 등을 비롯한 다수의 신서(新書)들을 구입해서 연구, 1853∼1859년경에 최초로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1860년 당시 오경석은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 때, 서양 열강의 근대적 무력과 경제력 앞에 붕괴되고 있는 중국의 참상을 보았다. 조선에도 곧 서양 열강의 침입에 의한 위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절감한 그는 구입한 신서들을 친우 유홍기(劉鴻基)에게 주어 읽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개화사상을 개진하여 유홍기의 개화사상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강상택, 『새로운 한국사의 이해』, 형설출판사, 1997.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998.
  •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개화활동」, 『역사학보』 107, 역사학회, 1985.
  • CHEN YANI, 「19세기 위원의 『해국도지』 판본비교와 조선 전래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