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정필(熊廷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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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말기에 요동경략의 책임을 맡아 싸우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한 인물.

개설

웅정필은 1608년에 요동의 감찰어사가 되어 심하 전투의 패배로 흐트러진 요동 지역의 방어태세를 재정비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21년 후금의 군대에 의하여 심양(沈陽)과 요양(遼陽)이 함락되자, 다시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임명되었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1625년 사형을 당하였다.

활동 사항

웅정필은 명나라 호광(湖廣) 강하(江夏) 사람으로, 1597년 향시에서 1등을 하였고, 1598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병법에도 밝고 활을 잘 쏘았다. 이후 보정추관(保定推官)을 제수받고,어사(禦史)에 발탁되었다. 1608년에 요동의 감찰어사가 되었다.

1619년 양호(楊鎬)가 심하 전투(深河戰鬪)에서 패배하자, 웅정필은 병부(兵部) 우시랑(右侍郞) 겸 도어사(都御史)로 요동경략에 임명되었다. 그는 달아난 장수들의 목을 베고 전몰한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한편 군사 장비를 점검하여 인심을 안정시켰으며, 흐트러진 방어 태세를 재정비하여 요동을 안정시켰다. 조선의 이정구(李廷龜)는 광해군에게 그가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필시 굳세고 명철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앞서 요동순안어사(遼東巡按御史)가 되었을 적에도 칭송이 높았다는 평가를 보고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12월 29일).

당시 명은 조선이 후금 측으로 기울어지지 못하도록 견제하며, 후금 공략을 위하여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웅정필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웅정필은 조선 장악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조선의 조공로에 병력을 증강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이 후금에 항복하면 후금이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를 공격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본 것이다.

웅정필은 천계제(天啓帝) 초에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621년 후금의 군대에 의하여 심양과 요양이 함락되자, 다시 요동경략으로 임명되었다. 후금군의 요서 진입을 막을 책임을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는 산해관(山海關)에 주둔하였는데, 광녕순무(廣寧巡撫)왕화정(王化貞)과 불화를 일으켰다.

당시 명 내부는 웅정필이 천계제를 황제로 올리는 데 공을 세운 동림당(東林黨)과 위충현(魏忠賢)을 중심으로 하는 엄당(閹黨)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웅정필은 동림당과 가까운 인물이었던 데 반하여, 왕화정은 엄당이 미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웅정필은 산해관의 방어를 굳건히 하되, 천진(天津)과 산동(山東) 등지의 수군을 활용하고 조선의 도움을 받아 후금을 배후에서 견제하는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을 구상하였다. 반면 왕화정은 한 번에 공격하여 후금을 박살내자는 입장이었다. 둘 사이의 입장 차이로 인한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당파 분쟁 상황은 조선에서도 후일까지 거론되었다(『영조실록』 24년 12월 25일)(『영조실록』 31년 9월 14일).

1621년 1월에 후금이 광녕을 공격해 오자, 웅정필은 왕화정을 독려하여 전쟁에 나서게 하였지만, 부하 장수 손득공(孫得功)의 배신으로 광녕을 잃고 말았다. 웅정필은 광녕을 잃은 책임을 지고 벌을 받게 되었으며(『광해군일기』 14년 4월 19일), 1625년에 사형을 당하였다. 당시 엄당의 비호를 받은 왕화정은 사형을 면하고 참수된 웅정필의 목이 변방에 전시되자, 절망한 명나라 관료들은 사직하거나, 요동의 지휘관들 중에는 후금에 귀순하는 이도 나타났다.

저술 및 작품

『요중서독(遼中書牘)』『웅양민공집(熊襄愍公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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