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가광(源家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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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막부의 3대 장군.

개설

1623~1651년까지 재위하였다.

가계

부는 일본 강호막부(江戶幕府)의 2대 장군인 덕천수충(德川秀忠)천이씨(淺井氏, お江, 崇源院)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인 장환(長丸)이 어려서 사망하자 실질적인 장남으로서 조부인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유명(幼名)인 죽천대(竹千代)를 이어받았다. 1620년(광해군 12) 9월 성인이 되어 가광(家光)으로 이름을 지었으며, 1623년 7월 27일 경도(京都)에서 장군직을 계승하여 3대 장군이 되었다.

활동 사항

1623년 막부장군직을 계승하였지만 그 후 중요한 정무는 거의 아버지인 덕천수충과 노중(老中)에게 처리하도록 하고, 자신은 장군의 후계자로 존재하였다. 1632년 4월 수충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장군직을 수행하였다. 1634년에는 50,000석 이상의 대명(大名)에게 판물(判物)과 주인장(朱印狀)을 지급하였다. 이즈음부터 막부의 지배 체제는 안정기에 들어갔다. 그는 지방의 각 번의 대명을 다스리기 위하여 장군의 허락 없이 대명들 간에 혼인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대명의 처자를 강호(江戶)에 살게 함으로써 대명이 1년마다 강호와 영지를 왕래하도록 하는 제도인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를 만들었다. 가광은 이 제도를 통하여 대명들의 세력을 약화시켰고, 나아가 천황의 특권을 대폭 축소하여 막번 체제(幕藩體制)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들을 제거하였다.

또한 무사계급의 교육과 행실에 대한 규정인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을 선포하였으며, 막부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하여 농민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제1대 장군인 덕천가강이 정한 기독교금지령을 더욱 엄격히 실행하여 그리스도교 교도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1633년에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1635년에는 일본배의 해외도항을 금지하였으며, 나아가 자유로운 무역을 통한 대명들의 경제력 강화와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1639년 쇄국령을 선포하여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에 오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1641년에는 장기(長崎)에 출도(出島)를 축조하여 네덜란드 상관을 평호(平戶)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쇄국 체제(鎖國體制)를 완성함으로써, 그는 강력한 정치력으로 덕천막부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가광은 노중을 막부 정치의 정점에 두고 유수거(留守居), 사사봉행(寺社奉行), 정봉행(町奉行), 대목부(大目付) 등의 여러 직책을 그 아래에 배치하여, 장군-노중-제직(諸職)으로 이어지는 계층적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노중을 중핵으로 한 조직이 막부 정치기구의 근간이 되었다.

한편, 1636년에는 ‘일본 태평의 축하’라는 명목으로 조선에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왔는데, 이는 ‘유천사건([柳川一件], 국서개작사건)’을 계기로 조일 간의 새로운 외교 체제가 성립된 것을 조선에 통고하고, 새로운 양식에 따른 외교의 출발로서의 통신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천사건은 당시 대마도의 가로(家老) 유천조흥(柳川調興)이 조선에 보내는 국서를 대마도주가 위조하였다고 막부에 고소한 사건으로, 일명 ‘국서개작사건’으로 불리었다. 이에 대하여 조선 조정은 ‘태평의 축하’라는 표면적인 이유 외에 ‘유천사건’에 관한 정확한 정보 수집, 덕천정권(德川政權)의 대조선외교정책의 진의, 가광정권을 비롯한 일본 국내 전반의 국정 탐색, 왜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통신사를 파견하였다(『인조실록』 15년 3월 9일).

묘소

1651년 4월 20일에 48세의 나이로 사망, 법호(法號)는 대유원(大猷院, [다이유인])이며, 하야국(下野國) 일광산(日光山)에 장사 지냈다.

참고문헌

  • 三宅英利, 『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 文獻出版, 1987.
  • 辻達也, 『江戶幕府政治史硏究』, 續群書類從完成會,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