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인(皇朝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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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들어와 정착한 명나라 유민과 그 자손.

개설

조선시대 때 외국에서 건너와 조선에 귀화하여 살게 된 사람들을 대개 ‘향화인(向化人)’으로 불렀다. 이런 귀화의 방식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 그 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다. 조선의 향화인은 구체적으로 건국 초부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직후까지 조선에 들어와 정착한 사람들로 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조선 정부에서 따로 관리한 ‘황조인(皇朝人)’이라는 부류가 있는데, 이들은 두 차례의 병란과 명의 멸망, 청의 건국 등의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조선에 유입된 한족(漢族), 즉 명나라 유민을 가리킨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실록』에서 황조인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용례는 1606년(선조 39)인데(『선조실록』 39년 4월 15일), 이때의 황조인은 단순히 중국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기사는 1755년(영조 31)이다(『영조실록』 31년 4월 24일). 이때에는 중국인으로서 조선에 귀화한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영조는 향화인과 황조인을 명확히 구분하도록 했다. 야인과 왜인의 자손은 ‘향화인’으로, 중국인의 자손은 ‘황조인’으로 부르도록 하고, 황조인은 향화의 예를 쓰지 않고 특별히 신포(身布)를 면제하도록 했다. 또 황조인장적(皇朝人帳籍)을 만들어 우대하도록 했다.

황조인을 우대하게 된 배경을 보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백성들의 감정이 심각하게 피폐해졌고, 정부에서도 이를 재건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효종의 대청복수론과 대명의리론을 내세운 북벌 계획이 차질을 빚으면서 이후 존주론(尊周論)으로 대체되었다. 오랑캐인 청이 중화인 명을 무너뜨리자 그 명맥을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명분을 표방한 것이다. 이런 존주론에 근거를 둔 조선은 명을 계승한 적통임을 표방하고 대보단(大報壇: 皇壇)을 설치했다. 숙종 당시 황단에는 명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모셨고, 양란의 충신과 열사도 배향했으며, 영조 때는 명의 태조(太祖)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영조의 대명의리론은 『존주록(尊周錄)』 이후 『황단의(皇壇儀)』, 『존주휘편(尊周彙編)』 간행으로 이어졌고, 1749년(영조 25) 대보단 중건 사업으로 고조되었다. 이와 함께 대명의리론의 실천 방안으로써 양란에 희생된 전사자나 충신열사가 이런 체제 수호에 공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현양(顯揚) 작업을 전개하였으며, 명나라 유민을 보살피고 포용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황조인에 대한 우대 정책으로는 1764년(영조 40)에 설치된 충량과(忠良科)가 있다(『영조실록』 40년 1월 20일). 명이 쇠망한 갑신년의 120주년이 된 때에 영조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거하다 순절한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 그 후손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충량과를 시행했다. 오직 현절사(顯節祠)와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된 사람의 후손과 황조인의 후예만 충량과에 응시토록 했다. 선발된 인원은 모두 군직을 맡겨 제사에 참여토록 했고, 1등에게는 회시(會試)에 나가도록 허용했다(『영조실록』 40년 3월 17일) (『영조실록』 46년 3월 21일).

또 확대된 대보단에 황조인의 후손 참여를 상례화하여 황조인 후손에 대한 명분상의 우대책이 마련되었다. 황조인 자손 중에서 취재(取才)를 거쳐 수복(守僕)을 삼아 황단의 수직(守直) 임무를 맡긴 것이다. 정조는 효종 때 만들어진 한인아병(漢人牙兵)을 ‘한려(漢旅)’라 부르게 하고, 그 구성과 임무, 경비 조달, 군수 등의 내용을 담은 「한려신설절목(漢旅新設節目)」을 반포하여 황조인의 생활이 한층 더 안정되도록 했다(『정조실록』 14년 3월 19일) (『정조실록』 14년 3월 19일).

황조인 개인에게 돌아간 실질적인 혜택은 증직(贈職)과 관직 제수였다. 명나라 관직자의 후손이거나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람의 후손에 대하여, 영조는 근황을 알아보고 그들을 만난 후 특별히 관직을 제수하거나 증직했다. 또 황조인의 장부[華人錄]를 만들어 역(役)을 면제해 주고(『영조실록』 30년 6월 12일), 쌀 등을 지급하거나 상을 내리고 혼수까지 마련해 주기도 했다.

황조인은 조선후기 대명의리론과 존주론을 바탕으로 향화인과는 다른, 명나라 후손을 보호하고 우대하는 가운데 조선의 위상을 분명히 하는 정치적 이념으로 마련된 것이다.

변천

황조인은 조선시대 귀화인의 한 부류로 조선후기에 집중되어 나타나는데, 이런 귀화인의 연원은 삼국시대로 올라간다. 신라나 후백제인의 ‘투화(投化)’, ‘내투(來投)’, ‘내부(來附)’, ‘귀부(歸附)’ 등과 모든 외국인의 ‘내주(來住)’, ‘귀화(歸化)’, 고려 때 외국인 포로로서 고려인으로 동화(同化)된 사람들, 원 간섭기 때 몽고의 공주와 그를 따라 들어온 사람 등이 있다. 조선시대 귀화인은 건국 때부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직후까지 조선으로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로 대개 한족, 북방의 여진족, 남방의 왜구 등이 있었다. 그런데 한족의 경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지원군으로 조선에 왔던 장병의 후손이거나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위해 조선으로 건너온 사람들, 혹은 명의 멸망 후 요동 지역 등으로 유입된 유민이 있었다. 조선 조정은 이들에 대하여 향화인과 황조인으로 구분하게 하였는데, 대개 향화인은 북방 여진족, 남방 왜, 소수의 아랍계 등이고 황조인은 한족에 해당한다.

숙종 이후 영조와 정조를 거쳐 황조인의 우대 정책이 극성했고, 그에 반해 향화인의 후손은 점차 조선의 일반 백성처럼 되어 동일한 역을 지거나 심하면 천역을 맡는 등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런 차별 정책으로 백성은 황조인을 부러워했고, 그로 인해 황조인을 모칭하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황조인은 조선말 고종대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자손을 등용하도록 했고, 과거시험에 있어서도 특별히 음악을 내리는 등의 우대 정책이 계속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정옥자, 『(조선 후기) 조선 중화사상 연구』, 일지사, 1997.
  • 노혜경, 「영조대 황조인에 대한 인식」, 『동양고전연구』37, 2009.
  • 서근식, 「조선시대 ‘향화’ 개념에 대한 연구-『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3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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