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관(品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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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향소(鄕所)의 좌수나 별감 같은 지방의 유력자를 이르던 말.

개설

품관(品官)은 본래 유품관(流品官)의 준말이다. 유품관이란 유품에 속하는 관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유품이란 문산계(文散階)와 무산계(武散階)를 받은 양반과 기술관 및 경아전, 곧 상급 서리(胥吏)녹사(錄事)를 포함하는 관리들을 의미한다. 녹사도 이서(吏胥)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양반의 음직(蔭職)으로 활용되었다. 1392년에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의하면 양반직·기술직·녹사뿐만 아니라 그러한 직을 받을 수 있는 산관(散官)을 가진 사람들까지 유품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토관(土官)·향리·내시(內侍)와 잡직을 받는 사람은 유품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조선전기에는 관품(官品), 즉 산계(散階)만을 가진 관인(官人)을 통틀어 품관이라고 하였으나, 유향분기(留鄕分岐)가 이루어진 조선후기에는 좌수나 별감 등 향임을 맡아하는 족속, 즉 향족을 품관이라고 하였다. 조선전기의 품관은 양반 품계를 가진 층으로 구성된 반면에 고려시대 품관은 양반뿐만 아니라 이서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품관들은 지방 사회의 지배자로서 양반 국가의 세력 기반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지방마다 유향소를 설치해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 세력을 견제하며 지역 사회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에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량품관(閑良品官)·전함품관(前銜品官)·재외품관(在外品官)·부경품관(赴京品官)·도내대소품관(道內大小品官)·거경품관(居京品官)·수전품관(受田品官)·유향품관(留鄕品官)·토성품관(土姓品官) 등, 품관에 한량·전함·재외·부경·도내대소·거경·수전·유향 등과 같이 품관의 상태를 밝히는 수식어가 첨부된 용어가 다양하게 검색된다. 한량품관이란 역이 없이 한산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고, 전함품관은 전함관, 즉 전직 관료라는 말이며, 부경품관·거경품관·수전품관은 군전을 받고 거경시위(居京侍衛)하는 품관을 말한다. 또한 재외품관·도내품관·대소품관·유향품관·토성품관은 거경시위할 대상이지만 아직 지방에 머물러있거나 거경시위 제도가 완화되어 지방에 머물러 있는 품관을 말한다.

고려시대부터 이들 품관은 향리와 함께 지방의 토착 세력으로서 많은 토지와 노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군공(軍功) 등을 통하여 첨설직이나 검교직·동정직을 얻어 중앙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향리층과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품관층들이 조선 신왕조 체제 안정의 협력 세력이라고 한다면, 향리들은 억압하고 규제하는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품관층은 조선왕조 지배층인 양반 사족의 근간을 이루는 층이라고 하겠다.

품관의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여 문산계나 무산계를 받은 양반과 기술관·경아전을 포함한 관리들인 유품관을 포괄하는 산관을 말한다고 하겠다. 이들 품관은 조선전기에는 유향소를 중심으로 경재소와 연계하면서 수령을 견제하고, 향리의 발호를 억제하는 향촌 지배 세력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 유향품관층들은 유향소를 중심으로 좌수·별감이 되어 경재소와 연계하여 향촌 사회의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수령과 향리 세력들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좌수·별감 등 향소의 지위가 낮아지게 되는 조선후기에는 이들 향족, 즉 품관층의 지위도 낮아지게 되어 사족과 향족이 엄격히 구별되었다.

변천

고려시대 품관과 향리는 지방 토착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관품이나 관직을 받은 바 있는 품관들은 점차 스스로를 향리와 구별하고자 하였다. 품관의 사회적 지위는 점차 높아져가는 데 반해 향리의 사회적 지위는 점차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전기에 품관군(品官群)과 향리군(鄕吏群)은 토성층(土姓層)과 속성층(續姓層)으로 갈리게 되었다. 그리고 향리들에게 더 이상 관품을 주지 않았다. 이 점은 서리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전기의 유향품관들은 향촌 사회의 지배층으로서, 유향소를 조직하여 그 지역 출신 재경 관료들의 조직인 경재소와 상호 연계를 가지면서 자치적인 향촌 지배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향약·동약 등의 기구와 조직을 통하여 향촌 사회를 지배하고 향촌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토호적 존재로서 양민을 모점하고 민전을 겸병하며, 부역이나 환곡을 물지 않고 천택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등 불법을 저질렀으며, 왕권을 대행하는 수령 및 관인들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1603년(선조 36) 경재소가 혁파되자 유향소의 좌수와 별감도 비록 향천을 거치기는 하였으나 그 임명권이 경재소에서 수령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1654년(효종 5) 「영장사목(營將事目)」의 반포를 계기로 향임의 기능이 더욱 악화되어 수령의 하수(下手) 기구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중앙의 관직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던 사족 층들은 향임을 기피하고, 향임을 담당하고 세습하는 계층인 향족층이 형성되어 사족인 ‘유’와 향족인 ‘향’이 나뉘게 되는 이른바 ‘유향분기’가 일어난다. 유향분기 이후의 품관은 보통 향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조선후기에는 경상도 안동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향분기가 일어나게 된다.

유향분기가 이루어진 조선후기 이후 향임층들을 품관 또는 향품(鄕品)이라 하여 관직을 가지는 사족보다 한 등급 떨어지는 양반으로 간주되었다. 즉 품관은 대개 좌수를, 때로는 좌수와 별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흔히 ‘좌수집’이니 ‘향소집’이니, 또는 ‘향족’이니 하는 말로 지칭되는 사람들이 품관의 범주에 속하였다. 좌수나 별감도 물론 양반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수령을 보좌하고 이속을 단속하며, 수령의 유고 시에는 그 직무를 대행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해당 지역 내에서의 권세는 웬만한 양반들이 대항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좌수집’이 되면 같은 양반 사회에서도 통혼을 꺼릴 정도로 그들을 낮추어 보는 것이 당시의 사회 풍토였다. 그리고 그들 품관은 일반 양반, 즉 사족과는 일단 구별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다만 안동 지역만은 예외였다.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도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유독 안동 지역에서만 양반 사족들이 좌수나 별감을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정조병오소회등록(正祖丙午所懷謄錄)』에서 경상도 출신 별군직 손상룡(孫相龍)이 무과 합격자를 선전관에 추천할[宣薦] 때에 가문이 좋은 사족 출신과 향족, 즉 품관 출신을 구별할 것을 주장한 가운데서도, “대개 한 도에서 오직 안동 한 읍만은 향소를 품관이 되지 않고 명가의 자제들도 향소가 되는 것을 꺼리지 않아서 향소 자제들도 좋은 벼슬을 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는다. 나머지 50여 읍은 한 고을에서 향족과 사족의 구별이 현격하여서 비록 사족집이라고 혹 향족으로 전락하여 혼벌을 잃는 사람이 있으면 한 문중 내에서도 역시 간격을 둔다.”고 하여 사족과 향족, 곧 품관의 신분적 격차가 엄격하였음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당시 안동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방에서는 향족과 사족이 현격하게 구분되었다. 전라도 남원 지방의 사족인 이문재(李文載)는 『석동유고(石洞遺稿)』에서 “본 남원부는 비록 넓은 백 리의 지방이라고는 하나 사류(士類)가 매우 적고 품관이 무려 500호나 되어 중과부적이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사론(士論)이 서지 않고 공의(公議)가 행해지지 못하며 조세와 요역에 관한 처리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고 누적되기만 한다. 더구나 이 고을 아전들은 간교하기가 극심하여 여러 가지로 백성들을 괴롭힌다. 만인 저들 품관이 이 고을의 기강을 바로잡는 실무자로서 사론과 공의를 잘 반영하고 아전들의 못된 짓을 단속하며 백성들의 괴로움을 풀어주어 남원부사로 하여금 힘들이지 않고 다스리도록 한다면 그들도 사족임에 틀림이 없으니 어찌 품관이라고 업신여기겠는가.”라고 하여 품관향족도 원래는 양반 사족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조선후기의 품관은 원래는 조선전기의 유향품관, 즉 재지사족에서 출발한 양반 사족이었지만, 오랫동안 과거 합격자나 벼슬한 자를 내지 못하여 재지사족 내에서 유향분기가 이루어져 재지사족 내에서 향족으로 전락하여 좌수나 별감 등을 하는 계층을 말한다. 이들은 양반 사족과는 계층이 달라서 서로 혼인도 가려서 하게 되고 지역 사회 내에서도 차별을 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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