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사(正陽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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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대표적인 명찰 가운데 하나로, 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중 교종에 속한 절.

개설

정양사(正陽寺)는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금강산에 위치해 있다. 창건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 태조왕건이 금강산에 왔다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나타난 것을 보고 정례(頂禮)한 뒤 절을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려시대 때 금강산은 『화엄경(華嚴經)』의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상주처로 인기가 높았는데, 특히 14세기 원과 고려 지배층들의 후원을 받아 사찰이 커지고 사원경제가 확대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정양사는 명산대찰로 주목받아 세종대에 교종 18사에 추가되었다. 금강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한국전쟁 후 절을 새로 복구하였다.

연원 및 특징

백제 무왕대에 관륵(觀勒)과 강운(降雲)이라는 백제 승려가 창건하고 신라 문무왕대 원효가 중창했다고 전하나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정양사는 고려시대에 태조왕건으로 인해 유명해지는데, 왕건은 법기보살이 현신하여 돌 위에서 빛을 내는 것을 보고 절을 하고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법기보살이 나타난 곳은 방광대(放光臺), 왕건이 절한 곳을 배점(拜岾)이라 불렀으며, 이 고사는 고려말 그림으로 표현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고려말 승려 나옹혜근(懶翁慧勤)이 원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금강산을 유력하던 1366년 3월부터 1367년 가을까지 주로 머물렀던 정양암(正陽庵)이 곧 정양사인데, 정양사에는 혜근 입적 후 그의 법복(法服)과 함께 혜근이 원 대도(大都) 광제사(廣濟寺) 개당설법(開堂說法) 후 순제(順帝)로부터 받았던 가사(袈裟)와 마노불자(瑪瑙拂子)도 봉안되었다. 나옹의 유물은 17세기까지도 정양사에 전하고 있어, 윤휴(尹鑴)는 절에서 보물로 여겨 소중하게 전해오고 있었음을 그의 유람기에 서술하였다.

조선 세종대에 서봉사(瑞峯寺)를 대신하여 교종 18사가 되었고, 세조의 후원을 받는 등 대찰로서의 위상을 유지했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찰이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후 금강산을 방문한 이정구(李廷龜)의 유람기에는 인근 표훈사(表訓寺)가 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다시 중건했다고 하였으며, 정양사는 절이 퇴락하여 중이 없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정양사는 1791년(정조 15) 중수했다고 한다.

한편 정양사는 금강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도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였고, 장안사와 표훈사를 갈 때 지나는 길에 있을 뿐만 아니라 헐성루(歇惺樓)에 오르면 금강산 12,000 봉우리를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어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 유점사(楡岾寺)의 말사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것을 전쟁 후 복구하였다. 현재는 반야전(般若殿)과 약사전(藥師殿)이 있는데 법기보살을 주존으로 봉안하고 있으며, 약사전에는 석조약사불좌상을 봉안했으며, 3층석탑과 석등이 전한다.

변천

조선 건국 당시 정양사의 정황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금강산 일대가 14세기 이후 원과 고려 왕실 그리고 양국 지배층의 후원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풍족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던 것으로 미루어 정양사는 조선 건국 후에도 여전히 대찰(大刹)로서의 위상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양사는 세종대 기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1424년(세종 6) 3월 유명무실해진 각 관(官)의 자복사를 모두 폐지하였고, 다음 달 세종은 기존의 7개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각각 18개씩 총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425년(세종 7) 5월 원래 교종 18사로 공인되었던 창평(昌平)의 서봉사(瑞峯寺)를 산수가 좋은 곳이 아니라 하여 공인을 취소하고 대신 정양사로 대체하였다. 이와 함께 서봉사의 전지 150결을 장안사로 이속하였다(『세종실록』 7년 5월 12일). 1432년(세종 14) 8월에는 명에서 온 사신 중 창성(昌盛)과 장정안(張定安)이 함길도를 다녀오면서 금강산 정양사에 들러 승려 300명에게 반승(飯僧)하였다(『세종실록』 14년 8월 10일).

1466년(세조 12)에는 세조가 금강산을 방문해 장안사, 정양사, 표훈사 등 금강산의 명산대찰에 행차하고 수륙회를 베풀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2년 3월 21일). 그리고 쌀과 찹쌀 등을 금강산의 사찰에 시주하였다. 1485년(성종 16) 10월 일본대마주태수(對馬州太守)종정국(宗貞國)이 중 앙지(仰之)를 특사로 보내 자신을 대신하여 금강산 유점사에서 향을 올릴 수 있게 해달라 청하였다. 이에 다음달 11월 앙지가 금강산에 갔는데, 유점사는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위치라 왜의 사신에게 보일 수 없다 하여 대신 표훈사와 정양사를 보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6년 11월 10일).

이처럼 금강산은 고려시대 이래 고려와 조선의 왕실, 사대부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기를 희망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이름이 높았는데, 정양사는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와 함께 조선시대 금강산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월사집(月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국립중앙박물관, 『아름다운 금강산 유리원판사진』, 국립중앙박물관, 1999.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1.
  • 최완수,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대원사, 1999.
  • 강호선, 「고려말 나옹혜근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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