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帝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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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신의 일종.

개설

제석(帝釋)이란 석가제환인타라(釋迦提桓因陀羅, Sakara­deva̅na̅m Indra)의 준말이며, 제석천(帝釋天)·석제환인(釋帝桓因)이라고도 한다. 원래 인도 고대 브라만교의 최고신인 인드라(Indra)였으나, 불교가 성립된 이후에는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도리천(忉利天) 선견성(善見城)에 거주하면서 사천왕과 32천을 통솔하고 불법을 보호하는 신으로 신앙되었다. 한국에서는 무속신의 하나로 숭배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한국에서 제석신앙은 삼국시대에 이미 수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더욱 확산되어 개경에 제석을 모시는 사원들이 건립되었고, 제석을 위한 제석도량(帝釋道場)이 국왕의 즉위 초나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서 수시로 거행되었다. 제석신앙은 전통적 천신신앙을 대체하는 것으로 수용된, 국가 내지 왕권 차원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점차 민간으로 퍼져나가면서 고려시대에는 민속종교화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제석은 무속에서도 신격으로 모셔졌으니, 무당의 몸주신 등이 그것이다.

변천

조선 왕조가 건국되면서 불교 배척 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제석신앙도 영향을 받았다. 1394년(태조 3) 왕궁 내의 내제석원(內帝釋院)을 파하고 복흥고(福興庫)를 둔 것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왕실에서의 제석도량은 조선초기까지 설행되었으며, 많은 사찰에서도 신으로 모셔졌다. 그리고 민속종교에서는 경상도 김해 등지에 제석당(帝釋堂)이 존속되었고, 무속 의례에서도 계속 제석이 모셔졌다. 1701년(숙종 27) 장희빈 측의 설향(雪香)이 인현왕후 저주굿을 거행하면서 제석거리를 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런데 이때 흰 장삼을 입고 제석거리를 한 사실로 미루어 제석신이 불교에서 유래한 신격임은 인지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현재 민속종교에서 제석은 농경신 내지 생산신으로 여겨지고 있으며(제석단지), 제석거리는 무속 의례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의의

제석은 불교와 민속종교의 혼합 현상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제석은 민속종교에 흡수되면서 신의 성격이나 역할은 상당 부분 바뀌지만, 제석신을 모실 때는 무당이 승복을 착용한다든지 제상에 육류를 올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 신격으로서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P00009266 01.PNG

참고문헌

  • 서윤길, 「제석사상과 그 신앙의 고려적 전개」, 『고려밀교사상사연구』, 불광출판사, 1993.
  • 안지원, 「제석도량의 설행 실태와 사회적 성격」,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 편무영, 「한국 불교민속의 형성론-제석신앙을 중심으로」, 『한국불교민속론』, 민속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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