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과(制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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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실시된 중시의 모본으로, 특출한 인재 발탁을 위한 중국의 과거 시험.

개설

제과는 중국당나라에서 특출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하여 임시로 실시하였던 과거제도의 하나로 처음에는 천자(天子)가 친히 문제를 내었으나 뒤에는 유사(有司)에게 위임하였다. 이를 모방하여 조선에서 실시한 시험이 중시(重試)였다. 중시는 도입 당시와는 달리 관리들에게 학문을 권면할 목적으로 10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제과의 성격을 띤 조선의 시험은 중시였다(『세종실록』 28년 1월 16일). 『중종실록』에는 태종이 중국 사람에게 물어서 제과를 모방하여 중시를 설치하였으나 그때는 중시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1407년(태종 7) 처음 실시한 중시에서 변계량이 수석을 하였고, 그다음 1427년(세종 9) 중시에서 정인지(鄭麟趾)가 수석을 하였다(『중종실록』 21년 10월 13일).

조선의 중시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중국의 제과와는 성격이 달랐다. 일단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된 이후에는 학업에 근면하지 않아 직책에 마땅하지 않은 이가 많아 왕이 친히 고열(考閱)하여 격려하고자 시험의 대상을 종3품 이하로 하였다.

이승소(李承召)의 『삼탄집(三灘集)』에 정인지가 1427년 정미년(세종 9)에 제과에서 수석으로 급제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정인지가 장원급제한 정미년의 시험은 중시였다. 조선초에 중시를 제과로 지칭한 사례였다.

세조가 즉위 초에 자주 성균관에 나아가 제과를 친히 책문(策問)하였다고 하나(『세조실록』 14년 6월 20일), 실제 ‘제과’라는 과명으로 설행된 과거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제과는 조선초의 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의 과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참고문헌

  • 『삼탄집(三灘集)』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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