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願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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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기 위해 위패나 초상화를 모신 사찰 혹은 사찰 내 전각.

개설

원당(願堂)은 원주(願主)의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이라는 의미로, 죽은 조상의 초상화나 위패 혹은 살아있는 사람의 전패 등을 모시고 명복이나 현세에서의 복락을 빌던 법당이다. 고려시대에는 사찰 전체를 원당으로 지정한 경우가 많아 주로 원찰이라고 불렀으며 조선시대에는 사찰 내 하나의 전각을 지칭하는 의미로 원당이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다. 재실(齋室), 재궁(齋宮) 등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내원당(內願堂), 위축원당(爲祝願堂), 능침사(陵寢寺), 조포사(造泡寺), 진전사찰(眞殿寺刹), 태실수호사찰(胎室守護寺刹) 등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래

원당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형태의 하나이다. 이미 삼국시대에 불교가 유입될 당시부터 내원당이나 능침사의 초기 형태가 발견된다. 매장의 형식을 중시하던 고대의 조상 숭배 신앙은 불교의 유입과 함께 사찰에 재물을 보시해 공덕을 쌓고 불력(佛力)을 통해 조상의 명복을 비는 형태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불교식 추천행위가 개인이나 일족(一族)의 발원 형태로 표현된 것이 원당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대에 건립된 평양 9사(寺)와 백제 침류왕대에 건립된 왕실사원들, 그리고 신라 진흥왕대에 궁궐 안에 설치된 불당이 초기 형태의 왕실원당이다. 원당은 신라중기까지 주로 왕실의 조상 숭배 시설로 지어졌다가 점차 귀족층으로 확산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원당은 고려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하는데, 고려의 왕실원당은 대체로 진전사원 형태로 설치되었다. 왕실의 진전이 사찰 내에 설치되어 이곳에서 각종 상·장례 의식이 치러졌다. 고려대에는 왕실뿐만 아니라 관인들의 원당 지정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고려전기에는 원칙적으로 왕실 외에 관인들이 원당을 창건하는 것은 법적으로 허락하지 않았고, 다만 특정 공신을 위해 일부 사원에 기일보(忌日寶)를 설치하거나 원당을 삼게 하는 것만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무신의 난과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면서 벼슬이 높은 관인과 귀족이 여러 사찰을 개인의 원당으로 삼았다. 이에 충선왕(忠宣王)은 1298년(고려 충선왕 즉위) 귀족들이 사사로이 설립한 원당의 건립을 금하는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원당은 주로 왕실에 의해 건립되었다.

원당을 설치하는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선왕·선후 등의 내세추복과 원주의 복락을 발원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면 왕실 내의 불교식 의례가 점차 폐지되면서 왕실의 신행 활동은 대부분 원당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왕실 구성원들은 왕실의 안녕과 선왕·선후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왕실 기도처를 마련했다. 또한 능묘 근처에는 능침사를 설치해 왕릉 주인의 명복을 빌었으며, 태실을 설치할 때에도 인근의 사찰을 지정해 태실을 보호케 하는 한편 태실주의 무병장수를 발원했다.

왕실원당은 능침사나 태실 수호 사찰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명산대찰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왕실 구성원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경우에도 원당으로 지정되었다.

변천

(1) 조선전기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조선말까지 꾸준히 원당을 설치했다. 조선초에는 국가 의례나 왕실 예제에 있어서 불교식 예법을 주로 따랐으므로, 특정한 사찰을 지정하거나 궁궐 내에 불당을 마련해 왕실 의례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교 사회를 표방하는 것과는 별도로 왕실 비빈 대부분이 불교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말기까지 원당의 설치가 계속 이어졌다.

왕실에서는 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에게 토지나 노비 등을 하사하여 불사 비용을 충당케 하였다. 또한 사찰의 중수 및 불사 때마다 내수사에서 재원을 지급했다.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사찰 내에는 어실(御室)이 마련되었다. 어실 내에는 선왕과 선후의 초상화가 모셔졌는데, 조선중기 이후 점차 위패로 교체되었다. 살아 있는 왕이나 왕세자의 경우에는 위패 대신 전패가 마련되었다. 어실에서는 매일 조석예불이 치러졌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 정월 초하루, 추석, 청명, 한식, 단오, 기신(忌晨) 때마다 크고 작은 재(齋)가 치러졌다.

문정왕후 섭정기에는 수백여 개의 왕실원당이 설치되었는데, 문정왕후는 불교계를 보호하기 위해 전국의 명산대찰을 내원당으로 지정했다. 또한 내원당완호법을 제정해 왕실원당에 유생들이 함부로 출입하거나 경제적 침탈을 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명종대에 내원당으로 불리던 사찰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원당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화되고, 내원당이라는 명칭은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2) 조선후기

조선후기에도 왕실에서는 꾸준히 원당을 지정해 왕실의 불교 의례를 담당하도록 조치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도성 내의 비구니원인 자수원과 인수원이 철폐되고(『현종개수실록』 2년 1월 5일), 능침사의 설치가 중단되지만, 비빈들이 왕자 탄생을 발원하는 원당은 크게 늘어났으며, 후궁이나 대군·공주 등 왕친(王親)들의 묘를 관리하는 조포사(造泡寺)의 설치 또한 꾸준히 이어졌다.

금강산, 속리산, 오대산 등에 위치한 명산대찰의 원당들과 태조의 원당은 조선후기까지 왕실의 특별한 보호 속에 원당의 기능을 유지해갔다. 또한 왕의 사친(私親)을 위한 원당이 크게 늘어났는데, 조선후기의 왕들은 종묘에 배향되지 못한 생부와 생모의 위패를 모신 원당을 설치해 추숭 시설로 삼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소령원의 보광사와 현륭원의 용주사이다. 소령원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묘이고, 현륭원은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이다.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에는 내수사나 호조, 해당 궁방 등에서 완문을 내려 지방관아의 침탈을 금지하는 한편 정기적으로 궁인들을 파견해 재(齋)와 어실 관리를 감독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왕실원당은 단순히 왕실 불사만 담당하는 사찰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의 경제적 보조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의 사찰은 각종 토목 공사에 징집되거나 중앙 및 지방 관아의 잡역을 담당해 왔는데, 왕실원당은 왕실에 대한 추복을 담당한다는 이유로 전세 및 각종 잡역에서 면제의 특혜를 누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원당 설치를 적극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원당에서는 내수사나 궁방에 소속되어 각종 잡역을 면제받는 대신 이들 궁방에서 치러지는 제사용품을 공급하고 사찰에서 생산되는 특산품 등을 납부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대부분의 궁방이 재정 적자에 시달렸는데, 궁방에서는 원당을 설치함으로써 능묘에 소요되는 노동력과 잡다한 물품의 일부를 공급받았다.

하지만 원당의 설치는 중앙 정부 및 지방 관아 수입의 절감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궁방의 원당을 모두 혁파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현종대부터 정조대까지 세 차례에 걸쳐 원당 혁파령이 내려졌다. 1660년(현종 1) 현종이 명례궁 원당을 제외한 나머지 궁가의 원당을 모두 혁파할 것을 명한 이후(『현종개수실록』 1년 4월 3일), 1717년과(『숙종실록』 43년 8월 1일) 1776년에(『정조실록』 즉위년 6월 14일) 또다시 원당 혁파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내려진 이후에도 왕실원당은 꾸준히 복설되어 원당 금지령은 사실상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원당에서 제공해온 노동력 및 제수물품 공급이 사라지면 이는 내수사 및 궁방의 재정 부담 증가로 이어졌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혁파령 이후에도 계속 원당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왕실원당은 사회적 변화에 따라 그 형태와 성격이 계속 변모해갔지만, 조선이 망할 때까지 꾸준히 설치되었다. 조선 500년간 꾸준히 불교 신앙을 이어온 왕실 구성원들은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원당을 설치해 불교계의 정치적·경제적 보호자임을 자처했고, 불교계는 왕실의 복락을 기원하고 왕릉 및 태실 등의 시설물을 보호·관리하면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어나갔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묘전궁릉원묘조포사조(廟殿宮陵園墓造泡寺調)』
  • 한기문,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민족사, 1988.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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