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로(李賢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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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3년(단종 1) = ?]. 조선 초기 세종(世宗)~단종(端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교리(校理)와 병조 정랑(正郞),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본관은 강흥(江興)이고, 초명은 이선로(李善老)이다. 아버지는 이광후(李光後)이다. 자식으로는 이건금(李乾金), 이건옥(李乾玉), 이건철(李乾鐵) 등이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 김종서(金宗瑞) 등과 가깝게 지냈는데,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안평대군의 당여(黨與)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

세종 시대 활동

이현로는 1438년(세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 교리가 되었다. 1447년(세종 29)에 집현전 교리로서 사왕(嗣王)의 즉위식에 사용할 의복 제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병조 정랑으로 제수되었고,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 참여했다. 평소에 풍수지리에 밝아 1448년(세종 30)에는 영응대군(永膺大君)이염(李琰)의 집터를 안국방동(安國坊洞)에 구해주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9년 2월 16일),(『세종실록』 29년 9월 29일),(『세종실록』 30년 12월 14일) 하지만 같은 해 12월, 이현로는 환관 최읍(崔浥)으로부터 청탁을 받아 최순(崔淳)과 김자려(金自麗) 등의 자급을 임의로 더해주었다는 죄목으로 병조 좌랑(佐郞)윤배(尹培) 등과 의금부(義禁府)에서 국문 받았다. 그 결과 이듬해인 1449년(세종 31) 윤배가 최순과 김자려의 근무 일수를 조작해 인사에 반영하였고, 이현로가 이 사실을 묵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세종은 이현로를 파면하라고 지시했지만 대간(臺諫)에서는 이현로를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현로가 공신의 자손이기 때문에 극형에 처할 수 없다며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다.(『세종실록』 30년 12월 24일),(『세종실록』 31년 1월 26일),(『세종실록』 31년 1월 28일) 이 때 세종은 병조 정랑권기(權琦)에게 이현로가 과거에도 인사권을 남용했는지에 대해 조사시켰는데, 그 결과 향화인(向化人) 홍사을마(洪沙乙麿)를 사직(司直)에 임용하는 등의 죄가 드러났다. 이현로는 죄가 드러나자 자신 역시 권기에게 청탁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자수하면서 병조 소속 관원 대다수가 옥사(獄事)에 휘말리게 되었다. 하지만 병조 판사(判事)김종서 등이 중재에 나서고 권기의 무고함이 드러나면서 이현로는 고신을 삭탈당하고 순창(淳昌)으로 유배에 처해졌다.(『세종실록』 31년 2월 3일),(『세종실록』 31년 2월 15일),(『세종실록』 31년 3월 1일),(『세종실록』 31년 3월 20일)

그러나 이 사건의 처리와 관련하여 대간은 계속해서 이현로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반발했고, 세종은 공신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답하며 대신 유배지를 남평(南平)으로 변경했다. 유배를 가는 도중에 이현로는 낙생역(樂生驛)에서 또 다른 인사권 남용에 대한 죄를 자수했다. 그 결과 이현로를 다시 불러와 국문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으나, 세종은 유배지를 다시 사천(泗川)으로 변경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후에도 대간에서는 이현로를 더 강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며 한동안 조정이 시끄러웠다.(『세종실록』 31년 3월 26일),(『세종실록』 31년 4월 1일),(『세종실록』 31년 4월 3일),(『세종실록』 31년 4월 5일),(『세종실록』 31년 4월 15일),(『세종실록』 31년 5월 11일),(『세종실록』 32년 윤1월 29일)

문종~단종 시대 활동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이현로는 김종서의 추천으로 다시 조정에 복귀했다. 처음에는 부사직(副司直)으로서 풍수학 서적을 다루는 일을 맡았다가, 영릉(英陵)의 비각(碑閣)을 세운 일에 대한 보상으로 사직으로 승진하였다. 이런 가운데에도 이현로의 복직이 부당하다는 주장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문종실록』 1년 1월 13일),(『문종실록』 1년 1월 15일),(『문종실록』 1년 7월 5일),(『문종실록』 1년 10월 16일),(『문종실록』 2년 3월 28일),(『문종실록』 2년 5월 1일)

단종 즉위 후, 이현로는 안평대군이용과 가깝게 지내며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을 멀리 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수양대군 대신 안평대군을 사은사(謝恩使)로 보내려고 꾀하기도 했다. 당시 수양대군, 안평대군, 김종서 등이 산릉 역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산릉도감(山陵都監) 장무(掌務)였던 이현로는 안평대군에게만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이 일로 수양대군은 이현로를 불러 심하게 매질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대간에서는 다시 그를 탄핵했으나 김종서 등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이현로는 안평대군의 당여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단종실록』 즉위년 6월 8일),(『단종실록』 즉위년 9월 10일),(『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6일),(『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8일),(『단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2일),(『단종실록』 1년 10월 10일) 정조(正祖) 때에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의 별단(別壇) 배향되며 신원이 회복되었다.(『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성품 및 일화

이현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풍수지리를 잘 알고, 잡술(雜術)에도 능해, 1444년(세종 26) 도성 내에 흐르는 개울물에 오물을 집어넣지 못하게 하여 명당수(明堂水)를 맑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어효첨(魚孝瞻)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국조보감(國朝寶鑑)』] 한편 그는 성질이 경박하고 조심성이 없었으며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미워했고, 안평대군에게 아부하는 것이 마치 가노(家奴)와 같다고 전한다.(『세종실록』 32년 윤1월 29일),(『단종실록』 1년 10월 10일) 안평대군과 어울리면서 이현로는 안평대군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암시하는 꿈의 내용을 적어 보내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행선지를 속이면서 안평대군과 여흥을 즐기러 가기도 했다.(『단종실록』 1년 5월 19일),(『단종실록』 1년 9월 9일)

세종 대 생원(生員)이었던 이영서(李永瑞)가 성균관(成均館) 소속 종의 처와 간통했다가 머리카락을 잘린 일이 있었다. 후에 이조 정랑이 된 이영서는 사정(司正)민서(閔敍)와 관계 맺은 기생이 있는 곳에 들어갔다가 또 머리카락을 잘렸는데, 이현로가 이영서의 집에 가서 위로하고 놀리기를,“자네의 머리털은 꼭 부추나물이네”라고 하였다. 부추나물은 베면 다시 자라기 때문이다.(『세종실록』 30년 6월 5일)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