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령의(直領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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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겉옷 또는 관복의 받침옷으로 입는 포.

개설

직령의(直領衣)는 둥근 깃의 단령과 마찬가지로 깃의 모양이 직선인 점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남성용 포(袍)로 직령(直領)과 동의어이며, 직령포(直領袍)·직령교임식포(直領交衽式袍)라고도 하였다. 직령의는 문헌에서 직령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직령은 문자 그대로 ‘곧은 깃’이라는 의미로서 깃 양식, 또는 독립된 하나의 포제(袍制)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직령은 관례복·혼례복·상례복·제례복·상복·편복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나, 직령의는 상례복(喪禮服)의 용도로 사용된 예가 많다.

연원 및 변천

직령은 고려말에도 입었다. 1387년(고려 우왕 13) 6월, 관복을 개정할 때 직령을 입을 수 있었던 계급은 서민과 천민 등 하층 계급이었다. 그러나 고려말에 대제학을 지낸 이조년(李兆年)의 아들 이포(李褒)의 영정을 보면, 머리에 발립(鉢笠)을 쓰고 직령에 사대(絲帶)를 띠고 화(靴)를 신은 것으로 보아 당시 상류 계급도 직령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민부터 왕까지 두루 착용했다. 직령의는 문헌상 직령과 함께 사용되고 있으나, 직령의는 상례복의 용도로 사용된 예가 많다. 왕세자와 왕세손이 상례복으로 입었으며, 내상(內喪)이 났을 경우 졸곡(卒哭) 전의 진현복으로 입었다. 왕비의 상제에서 졸곡 전에 진현할 때는 백직령의(白直領衣)·흑초립(黑草笠)·흑조아(黑絛兒)·백화(白靴)를 착용하였다(『세종실록』 28년 3월 27일). 하급관리, 특히 궐내에서 실무에 종사했던 별감, 소친시, 각차비인 등의 상례복으로도 입었다. 그밖에도 일본 사신 진향(進香) 시 선주(船主) 이하 8인은 흑마포(黑麻布) 직령의로 의복을 정하였다.(『세종실록』 30년 6월 21일)

형태

형태는 두루마기와 비슷하다. 직령의 무(武)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였으며 무 옆이 트여 있다. 조선초기에는 소매가 좁으며, 옷깃은 네모난 목판깃이고, 사각형의 무가 달려 있었다. 중기에는 소매가 넓어지고, 옷깃은 칼깃으로 되고, 무는 넓고 무의 위쪽을 뾰족하게 접어서 뒤로 젖혀 입었다. 후기에는 소매는 도포와 같이 두리소매가 되었고, 깃 궁둥이가 완만하게 되었으며, 무는 완전히 뒤로 젖혀져서 길에 무의 위쪽을 실로 꿰매 고정시켰다. 이러한 직령의 형태 변화는 단령의 형태 변화와 같다.

참고문헌

  • 김미자, 「직령에 관한 연구」, 『복식』5호 , 1981.
  • 이주영, 「조선시대 직령(直領)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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