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은대(鈒銀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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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3품의 관원이 관복을 입을 때 두르는 각대(角帶).

개설

정3품의 관원이 제복(祭服), 조복(朝服), 상복(常服)을 입을 때 두르는 각대이다. 품급에 따라 띠를 달리 하므로 품대(品帶) 또는 속대(束帶)라고도 한다. 3품이 띠는 은대(銀帶)는 띠돈에 문양을 새긴 삽은대와 문양을 새기지 않은 소은대(素銀帶)로 나누는데, 정3품은 삽은대를, 종3품은 소은대를 띤다. 품직에 따라, 관복의 종류에 따라 소재가 다른 각대를 띰으로써 신분을 구분하였다.

연원 및 변천

1387년(고려 우왕 13) 명나라의 관복 제도를 받아들여 1품에서 9품까지 사모에 단령을 착용하고 품계에 따라 1품은 삽화금대(鈒花金帶), 2품은 소금대, 3품은 삽화은대, 4품은 소은대, 5품에서 9품까지는 각대를 띠게 하였다. 『경국대전』「예전」의장(儀仗)조에는 각 품급에 따라 1품은 조복, 제복, 상복, 공복에 모두 띠돈이 무소뿔로 된 서대를 띠었으며, 정2품은 조복, 제복, 상복에 삽금대를 띠고 종2품은 소금대를 띠었다. 정3품은 삽은대를 띠었으며, 종3품과 4품은 소은대를 띠었다. 2품과 정3품의 공복에는 여지금대(荔枝金帶)를 띠었으며, 종3품과 4품의 공복에는 흑각대를 띠었다. 5품 이하 9품까지는 모두 흑각대를 띠었다.

삽은대에 대해서는 1462년(세조 8) 국왕이 후원에 나아가 신하들과 활을 쏜 후 노사신(盧思愼)을 승지로 임명하면서 삽은대를 띠고 숙배하도록 명하였다는 기록과(『세조실록』 8년 1월 16일). 1470년(성종 1)에는 중국 사신의 청에 따라 김효문(金孝文)에게 삽은대를 내려주었다[『성종실록』 1년 5월 20일 정유 2번째기사]는 기록이 있다.

한편 1794년(정조 18)에는 조정 관원들의 장복을 구비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때에 조복과 제복은 중요하기 때문에 마땅히 공인(貢人)을 두어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것이 나라의 제도인데 사치 풍조가 만연하면서 사사로이 화려하게 만들어 착용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정조실록』 18년 3월 29일). 그러나 이미 1508년(중종 3) 나라의 물력이 부족하여 조복은 개인적으로 장만하게 하였으며, 제복만 제용감에서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품대를 장만하기 위한 금은의 매매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태

현전하는 삽은대를 통해 그 형태를 살펴보면, 가죽에 흑칠을 한 각대(角帶) 위에 화조문(花鳥紋)을 새겨 투각한 심엽형(心葉形) 또는 여지 모양의 과판(銙板)과 방형(方形)의 과판에 은으로 테두리를 두른 형태이며, 과판 사이에는 은으로 꽃모양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앞에 여밈 장치인 교구가 있다. 띠는 관복의 겨드랑이에 붙어 있는 고리에 걸어 가슴 앞에 바짝 붙이고 허리 뒤는 늘어지게 해서 띤다. 이와 같이 금환과 과판으로 장식하고 교구로 고정하는데 품계에 따라 소재와 장식에 차이가 있다.

용도

삽은대는 정3품 관원이 제복, 조복, 상복을 입을 때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편, 『名選』(중),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2004.
  •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역사연구실, 『역주 경국대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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