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경각(欽敬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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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때에 만들어진 천문시계의 일종인 흠경각루를 보관하던 누각.

개설

흠경각(欽敬閣)은 흠경각루 즉, 옥루를 보관하는 누각으로 장영실이 건설한 것이다. 그 규모와 제도는 세종이 지시한 것으로,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흠경이라는 이름은 『서경(書經)』「요전(堯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후를 알려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에서 따온 것으로 관상(觀象)과 수시(授時)를 실천하는 집을 의미한다. 흠경각은 국왕이 백성에게 시간을 알려주고 천도(天道)의 차고 비는 이치를 깨달아 왕도 정치를 베푸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세종은 천문대를 경복궁 후원인 경회루에다 설치하여, 수시로 점검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천추전 서쪽 뜰에다 한 칸 집을 세운 것이 흠경각루이다. 세종은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며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천상의 시간을 지상의 시간으로 하사받아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천도의 차고 비는 이치를 깨달아 왕도 정치를 베푸는 귀감으로 삼았다.

흠경각 안에 설치되어 있는 천상의 물시계인 흠경각루 즉, 옥루에는 종이로 만든 산이 있었는데 이 산 사방에는 『시경』에 나오는 빈풍도(瀚風圖)에 따라 춘하추동의 풍경과 계절에 따라 농사짓는 풍경이 갖추어져 있었다(『세종실록』 19년 4월 15일). 세종은 이를 바라보며 국가 통치에서 백성과 농업이 가장 중요함을 되새기고자 했다.

세종이 서운관 관리들도 있는데 굳이 침소 가까이에 흠경각을 설치한 것은 평소에도 궁궐 밖으로 자주 행차하여 백성들이 사는 모습과 농사일을 직접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궁궐 밖 행차는 대단히 번거롭고, 수백 명에 이르는 수행원들이 동행하여 민폐가 컸다. 세종은 궁궐 안에서도 밖의 일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고 그것이 장영실이 만든 흠경각루이다. 인위적인 기계 작동이기는 하나, 해가 뜨고 지는 것과 사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는 자동 무대 장치인 흠경각루를 보면서 세종은 궁궐 밖의 백성들의 삶과 농사일을 상상했다.

변천

흠경각루와 그것을 보관하는 집인 흠경각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이후 영조 때 흠경각을 지었는데, 이 흠경각은 옥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을 보관하기 위하여 창경궁에 지은 것이다. 지금 경복궁에 복원된 흠경각은 대원군 때 지은 것이다. 이것은 옥루나 ‘천상열차분야지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박성래, 「세종대의 천문학 발달」, 『세종조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전상운, 「이씨조선의 시계제작 소고」, 『향토 서울』, 197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