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빈김씨(明嬪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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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9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후궁.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김작(金碏)이며, 어머니는 정자순(鄭子順)의 딸인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역임하고 좌의정에 추증된 김종숙(金宗淑)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밀직부사(密直司使)를 지낸 김승(金陞)이다. 성종의 많은 후궁들 중에 유일하게 정1품의 빈 품계를 받은 후궁이다. 성종과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두 명의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이며, 아들인 무산군(茂山君)이종(李悰)과 딸인 휘숙옹주(徽淑翁主), 경숙옹주(敬淑翁主), 휘정옹주(徽靜翁主)가 있다.

성종의 후궁

김명빈(金明嬪)은 형조 판서(判書)를 지낸 아버지 김작과 정자순의 딸인 어머니 동래 정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종의 후궁이 되어 숙원(淑媛)에 봉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대왕 묘지문]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에 숙의(淑儀)로 진봉되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2년 1월 6일)

그런데 김명빈은 직첩이 숙용으로 강등된 것으로 보인다. 1524년(중종 19) 무산군은 그의 어머니가 병에 걸린 지 오래되었는데 약이 효험이 없으므로, 온정(溫井)에서 목욕하기 위해 충청도로 내려가려고 한다며 중종에게 허락을 청했다. 이 때 이종은 그의 어머니를 김숙용(金淑容)이라고 표현하였다. 당시 중종은 무산군의 요청을 허락하였지만, 선왕의 후궁 중에 외방에 나가 병을 고친 사람은 없다며 대신이 반대하는 탓에 얼마 후 김숙용의 온천행을 금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19년 7월 11일)

이후 아들인 무산군의 아들 태안군(泰安君)이팽수(李彭壽)와 부안군(扶安君)이석수(李碩壽) 등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從功臣)에 책봉되면서 명빈(明嬪)에 봉해졌다.

묘소와 후손

김명빈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있는데, 묘표석에 ‘숙의증명빈계림김씨지묘(淑儀贈明嬪鷄林金氏之墓)’라고 쓰여 있다. 김명빈의 묘역 아래에는 아들인 무산군의 무덤이 있다.

김명빈은 성종과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낳았는데, 두 명의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남 무산군은 신수(申銖)의 딸인 군부인(郡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와 결혼하여 8남 4녀를 두었다. 1남 영선군(永善君)이구수(李龜壽), 2남 영천정(永川正)이미수(李眉壽), 3남 영안정(永安正)이학수(李鶴壽), 4남 영풍정(永豊正)이기수(李期壽), 5남 태안군이팽수, 6남 부안군이석수, 7남 중모수(中牟守)이담수(李聃壽), 8남 영원군(永原君)이덕수(李德壽)이다. 또 1녀는 주부(主簿)신태충(申太沖)에게, 2녀는 별좌(別坐)이언상(李彦祥)에게, 3녀는 판관(判官)황몽정(黃夢禎)에게, 4녀 참봉(參奉)박주(朴舟)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성종과 김명빈 사이에서 태어난 3녀 가운데 1녀인 휘숙옹주는 풍천 임씨(豐川任氏)로 이조 판서를 지낸 임사홍(任士洪)의 아들 풍원위(豐原衛)임숭재(任崇載)와 결혼하여 3녀를 낳았다. 2녀인 경숙옹주(敬淑翁主)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영유현령(永柔縣令)을 지낸 민종원(閔宗元)의 아들 여천위(驪川尉)민자방(閔子芳)과 결혼하여 1남 민사준(閔士俊)을 두었다. 3녀인 휘정옹주(徽靜翁主)는 의령 남씨(宜寧南氏)남흔(南炘)의 아들인 의천위(宜川尉)남섭원(南燮元)과 결혼하여 1녀를 두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지두환, 『성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