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길(尹承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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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0년(중종 35)∼1616년(광해군 8) = 77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이자 유학자. 의정부 참찬(參贊)과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자는 자일(子一)이고, 호는 남악(南岳)이다. 봉작(封爵)은 해선군(海善君)이며,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윤홍언(尹弘彦)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장림(長臨) 수(守)이순민(李舜民)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윤은필(尹殷弼)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군기시(軍器寺)첨정(僉正)을 지낸 윤훤(尹萱)이다. 영의정윤승훈(尹承勳)의 형이자 선조의 제 7왕자 인성군(仁城君)의 장인이기도 하다. 선조(宣祖) 때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고 초연하였다.

명종 말기 ~ 선조 전반기 활동

1561년(명종 16)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고, 1564년(명종 19)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방목(榜目)』]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66년(명종 21)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어,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이때 예문관 검열이었던 유성룡(柳成龍)과 동료로 오랫동안 같이 근무하였다.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사헌부 감찰을 거쳐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퇴당집(退堂集)』 권3 「좌참찬남악윤공신도비명(左參贊南岳尹公神道碑銘)」 이하 「윤승길비명」]

1570년(선조 3) 병조 좌랑에 임명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1년(선조 4)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로 좌천되었다가,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로 전임되었다. 조정으로 돌아와 승문원 교리(校理)와 예조 좌랑을 거쳐 호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윤승길비명」] 1573년(선조 6) 병조 정랑으로 전임되었으며,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어. 종학(宗學)도선(導善)을 겸임하였다. 그 후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곧바로 체차(遞差)되었고, 성균관 전적과 형조 정랑을 거쳐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전임되었다.[「윤승길비명」],(『선조실록』 6년 8월 9일)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에 임명되었으나, 1574년(선조 7) 공무상의 실수로 파직당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이어 3도(道)의 해운(海運) 판관(判官)에 기용되었고,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군기시 첨정으로 전임되었다.[『택당집澤堂集)』 별집 권8 「좌참찬윤공행상(左參贊尹公行狀)」 이하 「윤승길행장」]

1576년(선조 9)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3년 상례(喪禮)를 치른 후, 조정으로 돌아와 종부시 (宗簿寺) 첨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다시 외직을 자청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윤승길비명」] 1582년(선조 15) 목장의 말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성균관 사예로 기용되었으며,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으로 전임되었다. 이때 예조에서 일본 사신을 접대하면서 여악(女樂)을 쓰려고 하자, 그가 옳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그만두도록 하였다. 다시 성균관 사예가 되었는데, 그 해에 명(明)나라 조사(詔使)가 나오자, 영접도감(迎接都監)낭청(郎廳)이 되었다. 그 뒤에 종부시(宗簿寺)정(正)으로 전임되었다.[『백호전서(白湖全書)』 권22 「좌참찬증영의정윤공시장(左參贊贈領議政尹公諡狀)」 이하 「윤승길시장」]

사도시(司䆃寺) 첨정과 종부시 첨정을 거쳐, 사섬시(司贍寺) 정·사재감(司宰監) 정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사섬시 정으로 재임할 때에는 포흠(逋欠)된 재화를 찾아내고 재화가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법으로 엄하게 단속하였다. 궁중의 음식 재료를 관장하는 사재감 정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음식 재료를 나누어 관리하고 엄중히 단속하였으며, 궁중의 비빈(妃嬪)과 결탁한 교활한 서리들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사도시 정과 사옹원(司饔院) 등을 거쳐 경상도추쇄경차관(慶尙道推刷敬差官)이 되었다.[「윤승길비명」]

1584년(선조 17)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례를 치른 뒤 상의원(尙衣院) 정으로 복직하였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전임되었다. 그때 왕명을 받들고 충청도 지방의 재해 상황을 점검하고 돌아와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윤승길시장」] 1587년(선조 20) 12월 평안도구성부사(龜城府使)로 임명되었다. 구성은 변방이었으므로 모두 구성부사에 부임하는 것을 꺼렸으나, 그는 기꺼이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당시 조정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의 막냇동생 윤승훈은 친구들과 같이 당파 싸움에 휩쓸렸으나, 그는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고 초연하였다. 그러므로 사헌부 장령과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음에도 밀어주는 당파가 없어 청요직(淸要職)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변방의 수령관으로 나가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20년 12월 1일)

1591년(선조 24) 52세에 비로소 도당록(都堂錄)에 참여하였는데, 동생 윤승훈과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가 너무 늦은 나이에 이름을 올린 것에 대하여 애석해 하였다.[「윤승길시장」] 윤승길은 일찍부터 명성을 날렸지만, 성격이 강직하고 곧아서 남과 쉽사리 어울리지 못하고 시세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의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이때서야 승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조 중기 임진왜란 때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구성부사로 재임하던 윤승길은 군량미 조달과 군사 모집에 큰 공을 세웠다.[『고봉집(高峯集)』「논사록(論思錄)」 권하] 그는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내의 장정을 모두 동원하여 군사로 삼은 후 토병(土兵) 가운데 상당수의 기병(騎兵)을 모아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의 군영(軍營)에 귀속시키면서, 도원수의 군대가 기세를 떨칠 수 있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5만 명의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그해 12월 명나라 동정(東征)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이 요동 군사 4만 7천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때 명나라는 중국군의 군량미와 전쟁 물자를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조선의 의주로 수송하였다. 그러면서 이 군량미를 조선 내 명나라 군사들에게 공급하는 것이 조선의 중요한 당면 과제가 되었다. 당시 윤승길의 동생 윤승훈이 조도사(調度使)가 되어 의주에서 군량미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윤승길은 분주히 길을 왕래하며 군량미를 의주로 운송하였고, 동생 윤승훈은 힘을 다해 군량미를 주선하면서, 조선과 명나라 군대의 군량미 조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윤승길비명」]

도원수김명원은 임진왜란 전후에 걸쳐 수고한 구성부사윤승길의 공적을 비변사(備邊司)에 보고하였다.[「윤승길비명」] 그러자 비변사에서는1592년 8월 선조에게 “도원수김명원의 장계에 의하면, 구성부사윤승길은 홀로 전시 중에 관가의 창고를 보전하면서 군사를 뽑고 양식을 운반하였으니, 특별히 벼슬과 자품을 올려주어 여러 고을 수령들이 감동하여 본받게 하소서” 하였다.(『선조실록』 25년 8월 15일) 선조는 비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윤승길을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였다.(『선조실록』 25년 8월 16일)

1593년(선조 26) 봄 명나라에서는 명나라 군대를 총지휘하기 위하여 병부 시랑(侍郞)송응창(宋應昌)경략(經略)에 임명하여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예조 판서윤근수(尹根壽)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어 경략송응창을 접대하고, 구성부사윤승길은 도차원(都差員)에 임명되어 차사원(差使員)을 데리고 명나라의 요동 군사를 응대하게 되었다. 요동 군사는 본래 사납기로 소문이 났는데, 조선에 들어와서 백성들에게 매우 포학하게 굴었을 뿐만 아니라, 차사원들을 통하여 조정에 무리한 요구를 하였으므로, 이들을 응대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윤승길은 그들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조정하고 차사원들로 하여금 일일이 찾아가서 직접 물자를 전달하게 하니, 요동 군사들이 감복하여 함부로 차사원을 대하지 않았다. 접반사윤근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윤승길을 불러서 상의하였는데, 두 사람은 가까운 친척 사이였다.

그해 10월 윤승길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하였으나, 사간원에서 “충청관찰사윤승길은 멀리 구성에 있으므로 오가는 기간이 길면 여러 달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본도의 형편이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는데, 관찰사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개차(改差)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선조가 임시방편으로 승정원 승지(承旨)로 있던 그의 막냇동생 윤승훈을 충청도관찰사로 보내고, 윤승길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그해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하였다.(『선조실록』 26년 10월 22일),(『선조실록』 26년 10월 26일),(『선조실록』 26년 10월 29일)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 봄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송유진(宋儒眞)이 반란을 일으키자, 충청도관찰사윤승훈이 송유진과 그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마침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한 윤승길이 <송유진의 난(亂)>을 국문하게 되었다. 당시 송유진의 역모에 연루된 도당(徒黨)이 매우 많았는데, 윤승길이 “기근과 전쟁으로 어려운 때 역적의 공초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체포한다면, 인심이 이반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조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모자 16명만 처형하고, 그 나머지는 추문하지 않았다.[「윤승길비명」]

그해 3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강신(姜紳)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탄핵 당하자, 비변사에서 승정원 승지윤승길을 강원도관찰사로 추천하였으므로, 선조가 그를 임명하였다. 윤승길이 숙배하고 하직하던 날, 선조가 그를 인견(引見)하고 술을 내려주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실로 나의 잘못 때문이다. 지금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이원익(李元翼)을 제외하고는 나라를 위해 있는 힘을 다 하려고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아무쪼록 나의 이러한 뜻을 헤아려 그대의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윤승길은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직무에 충실하였으며, 속오법(束伍法)을 창안하고 시행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선조수정실록』 27년 3월 1일)

1595년(선조 28) 강원도관찰사윤승길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비변사에서 후임자를 찾기 어렵다고 하여 왕에게 유임시키도록 계청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유성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안도관찰사이원익을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윤승길을 평안도관찰사에 임명하였다. 1595년(선조 28) 6월 평안도순찰사(平安道巡察使)를 겸임하였는데, 그는 모든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처리하는 성격이었으므로, 무리하게 일을 하다가 마침내 과로로 쓰러지면서 오랫동안 공무를 처리하지 못하였다.(『선조수정실록』 28년 6월 1일) 그해 11월 사간원에서 “왜적이 경내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어 화기(禍機)를 헤아릴 수 없으니, 그 지역을 맡은 관찰사들은 병을 핑계로 해직해달라고 애걸하며 자신의 안일만을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에 5도 감사가 혹은 병으로, 혹은 자기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관직을 그만두었습니다. 병세의 경중과 사정의 절박함을 알 수는 없습니다만, 평안도관찰사윤승길과 강원도관찰사송언신(宋言愼) 등을 추고하소서” 하니, 왕이 추고하도록 명하였다.(『선조실록』 28년 11월 20일)

선조 후반기~광해군 때 활동

1597년(선조 30)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로 복직되었으나 병으로 왕에게 숙배(肅拜)하지 못하였고, 1599년(선조 32) 병이 조금 나은 후에야 조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국경 지방을 자주 침입하였으므로 비변사에서 그를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추천하였으나, 전에 앓던 병이 아직 낫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세 번이나 소장을 올려 체직되고, 다시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2년 4월 21일) 그 뒤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의금부(義禁府) 동지사로 전임되었고, 명나라 경리(經理)양호(楊鎬)를 접대하는 접반사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판으로 전직되었다.[「윤승길비명」],(『선조실록』 32년 윤4월 13일),(『선조실록』 32년 12월 16일)

1600년(선조 33)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거쳐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병조 판서였던 홍여순(洪汝諄)은 뇌물을 많이 받아 문제가 되고 있었다.(『선조실록』 33년 5월 19일) 이때 죽산에 사는 주씨(朱氏)가 윤승길에게 노비 10명을 바치고 보장(堡將)의 자리를 얻고자 하였으나, 윤승길은 “나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한다”며 뇌물을 물리치고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홍여순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행하는 날이면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1603년(선조 36) 선조의 특지(特旨)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이 해에 그의 딸이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과 혼인하였다.(『선조실록』 36년 2월 21일),(『선조실록』 36년 3월 9일) 그 뒤에 체차되어 서반(西班)으로 자리를 옮겨 중추부 동지사가 되어, 춘추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윤승길비명」],(『선조실록』 36년 7월 4일) 1604년(선조 37) 전의감(典醫監)제조(提調)가 되었고, 1605년(선조 38) 구성부사로 있을 때 명나라 군사를 잘 응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하사받았다. 당시 대간에서는 서정(西征) 장사(將士)를 제외하고 평안도의 수령으로 공로가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훈적(勳籍)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윤승길은 정훈(正勳)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조정에서 특별히 그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려 주었다.[「윤승길비명」]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을 거쳐, 1607년(선조 40) 4월 중추부 지사가 되었고, 윤6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40년 4월 13일),(『선조실록』 36년 윤6월 1일)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광해군이 즉위한 후, 그해 11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11월 9일) 1609년(광해군 1)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다시 중추부 지사(知事)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지사를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10월 16일) 이때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윤승길비명」]

1612년(광해군 4) 그는 중추부 지사로서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였는데, <임해군(臨海君) 옥사>를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4년 11월 24일) 옥사의 추국이 끝난 후, 전례에 따라 익사공신(翼社功臣)에 녹훈되었고,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으며, 해선군(海善君)으로 책봉되었다. 11월 이조에서 “익사공신 윤승길은 숭정대부에 올랐으니, 참찬(參贊)의 본직을 그대로 제수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이조의 의견에 따라 그는 중추부 지사에서 의정부 좌참찬으로 복귀하였다.(『광해군일기』 4년 11월 23일) 1615년(광해군 7) 사섬시 제조에 임명되자, 윤승길은 글을 올려 고향의 전리(田里)로 돌아가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616년(광해군 8) 11월 21일 노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7세였다.[「윤승길비명」] 이어 부인도 남편을 뒤따라가려고 한 달 동안 곡기를 끊는 바람에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광해군일기』 8년 11월 21일)

성품과 일화

윤승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용모가 준수하고 자태가 단아하였다. 성품이 곧고 강직하여 남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경학(經學)을 익히면서부터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고 자기를 절제하려고 노력하였다. 성색(聲色)의 즐거움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므로, 평생토록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창기(娼妓)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항상 행동을 조심하고 학업에 부지런하여 남에게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친한 친구들과 농담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다.[「윤승길행장」] 그는 어릴 때에도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집안에 소장된 귀중한 물건이 없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의 부모는 집안의 아이종들을 모아 놓고 누가 훔쳐갔는지 힐문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있던 어린 윤승길이 아이종 하나를 가리키면서 “얼굴빛을 보니, 네가 훔친 것이 틀림없구나” 하였는데, 과연 그 아이종이 자복하자 부모가 어린 아들을 무척 기특하게 여겼다.[「윤승길시장」]

가학(家學)으로 22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때 성균관 좨주(祭酒)였던 허균(許筠)·허난설헌(許蘭雪軒)의 아버지 허엽(許曄)이 윤승길에게 『중용(中庸)』·『대학(大學)』을 강설(講說)하다가, 그의 학문하는 진지한 태도를 보고 탄복하였는데, 윤승길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속유(俗儒)의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윤승길비명」]

1561년(명종 19) 경학에 통달하여 문과에 급제한 뒤, 대간(臺諫)에 들어가서 사헌부 장령과 사헌부 집의(執義), 사간원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남의 잘못을 들춰내 고발하면서 자신은 곧은 것처럼 자기를 과시하는 법이 없었고, 임금을 섬기면서 절대 속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정사(政事)를 볼 때에는 먼저 전고(典故)를 조사하여 그 장단점을 분명히 밝히고 그 단점을 개혁하면서 기강을 세우기에 힘썼으며, 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여러 가지 폐단까지도 귀신같이 밝혀내어 엄중하게 다스렸고, 송사(訟事)의 판결도 민첩하고 신속하였다. 그러나 시세에 편승하여 자기의 신념을 굽히거나, 시속(時俗)을 따라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윤휴(尹鑴)는 “그야말로 현실적인 일을 처리할 줄 아는 학문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두루 사리에 통달한 재질의 소유자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하였다.[「윤승길시장」]

정승 심희수(沈喜壽)는 윤승길에 대하여 “일생동안 오로지 고요한 심경을 유지하면서 한 번도 자신의 신념을 굽혀 남을 따르지 않았으니, 진정 그를 ‘철석간장(鐵石肝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신흠(申欽)은 “국법의 규례를 익히 알고 있어서 정치의 요체(要諦)를 통달하였고, 아랫사람들을 다룰 때 마치 ‘나무꾼이 젖은 섶나무를 꾹꾹 눌러서 묶는 것[束濕薪]’처럼 억눌러서 제어하였는데,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하였다.[「윤승길비명」] 영의정을 지낸 막냇동생 윤승훈은 둘째형 윤승길을 마치 스승처럼 모시고 따랐는데, 형이 항상 시세에 따르지 않아 당파에서 밀어주지 않아 한직에 머물러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시속에 따르도록 권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윤승길이 젊었을 때 과거장에서 문명(文名)을 날리자, 문인(文人) 김태정(金泰廷)이 진정으로 그와 교유하고 싶어서 함께 학문을 강론하자고 정성을 다하여 청하였으나, 그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예문관에 있을 때, 대신 홍섬(洪暹)·이준(李俊), 승정원 승지이후백(李後白)과 유학자 기대승(奇大升) 등이 모두 윤승길은 앞으로 크게 쓰일 재기(才器)의 소유자라고 칭찬하였다.[「윤승길시장」]

1575년(선조 8) 인순왕후(仁順王后)의 국상(國喪)을 치를 때, 윤승길이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낭청이 되었다. 그 이전에도 도감의 낭청은 청렴한 인사들을 선발하여 임명하였으나, 그 일이 잗달고 번거로워서 낭관은 으레 업무를 직접 살피지 않고 서리와 종들에게 그 일을 떠맡기고 느슨하게 관리하였다. 이때 윤승길은 대장간을 관장하는 직책을 맡았는데, 그는 수량을 파악하는 일을 싫어하지 않고 아주 적은 분량까지도 세세히 파악하였으므로, 일을 마무리한 뒤에 쓰고 남은 무쇠 3천 근(斤)을 반환할 수 있었다. 판서윤현(尹鉉)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산릉의 역사를 치르면서 물자를 더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물자가 남았다고 하는 사람은 내 평생에 이 낭청이 처음이다”라고 하였다.[「윤승길비명」]

1582년(선조 15) 윤승길이 성균관 사예로 있을 때 명나라 조사가 오자, 그가 영접도감의 낭청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낭청의 낭관(郎官)을 엄격하게 선발하였으나, 그 중에는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도 있었다. 산릉도감 보다 영접도감의 낭관에게서 이러한 현상이 더 심하게 나타났다. 당시 그는 술을 만드는 주국(酒局)의 일을 맡아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였는데, 동료 낭관이 날씨가 몹시 춥다며 술 한 잔을 달라고 청하자, 그는 “아직 공식적인 연회도 열리지 않았는데, 이 술을 다른 사람이 먼저 먹을 수는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때 원접사(遠接使)이이(李珥)가 우연히 이 말을 듣고 윤승길을 칭찬하며 술을 요구했던 낭관을 나무랐다.[「윤승길행장」]

1595년(선조 28) 강원도관찰사윤승길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비변사에서 후임자를 찾기 어렵다며 임금에게 그를 유임시키도록 계청하였다. 그때 선조가 영상유성룡을 불러 “우의정의 자리가 비게 되었는데, 누구를 정승으로 삼으면 좋겠는가?” 하고 묻자, 유성룡이 “지금 인망이 평안도관찰사이원익에게 돌아간 지 오래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렇다면 평안도관찰사는 누가 대신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유성룡은 “이덕형(李德馨) 같은 사람이면, 그 임무를 감당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였다. 선조가 “강원도관찰사의 치적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어려운 때에 관찰사의 임무를 맡아 주민들을 다스리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데 각각 조리와 법도가 있었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니, 이 사람을 평안도관찰사로 전임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지금 만약 그를 바꿀 경우에 강원도에서 추진하던 일이 중도에 흐지부지될 것입니다. 신 등이 그를 유임시키도록 요청한 것은 특히 그의 후임자를 고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지방에도 경중(輕重)이 있는 법이다.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며 단호하게 말하고 이튿날 이원익을 우의정으로 삼고 윤승길을 평안도관찰사로 파견하였다.[「윤승길비명」]

한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윤승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분강개하기를 잘하여 그와 의견이 맞는 사람이 적었으므로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으나, 구성부사가 되면서 비로소 관리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임진왜란 때 병기를 수선하고 전쟁 물자를 마련하던 능력이 서로(西路)에서 제일 뛰어났다. 그는 이원익의 뒤를 이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는데, 두 사람의 치적이 거의 비슷하였다. 동생 윤승훈은 당론(黨論)을 주장하여 빈객(賓客)이 많았으나, 형 윤승길은 교제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사위가 바로 인성군이공(李珙)이었으나, 그는 한 번도 궁금(宮禁)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선조가 일찍이 그의 아들 이공에게 ‘너의 장인은 내가 즉위할 때 바로 사신(史臣)이었다. 그는 사람이 교만하고 강직한 것이 결점이다’고 하였다. 선조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돌아간 은택은 다른 인척들에 비해 매우 야박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이래 여러 차례 변란을 겪으면서도 윤승길의 집안이 초연히 궁가(宮家)의 화를 면하였던 이유는 그가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지내며 몸가짐을 바르게 가졌기 때문이었다.(『광해군일기』 8년 11월 21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숙간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지평현(砥平縣) 용문동(龍門洞)에 있는데, 유명천(柳命天)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윤승길비명」] 처음에 이식(李植)이 그 행장(行狀)을 지었고, 나중에 윤휴(尹鑴)가 그 행장을 기초로 하여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윤승길행장」],[「윤승길시장」]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4년이 지난 1680년(숙종 6) 3월 ‘숙간’이란 시호를 내려주었는데, 그때 윤휴가 시호를 청하면서 시장을 지었다.(『숙종실록』 6년 3월 18일) 인조 때 그의 둘째아들 윤미(尹瑂)가 호성(扈聖) 원종공신이 되면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윤승길비명」]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광주목사(廣州牧使)박간(朴諫)의 딸인데,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윤신(尹璶)은 평양서윤(平壤庶尹)이고, 차남 윤미는 온양군수(溫陽郡守)이며, 3남 윤부(尹璷)는 내시(內侍) 교관(敎官)이고, 4남 윤제(尹璾)는 광흥창(廣興倉)수(守)이다. 장녀는 군기시 첨정이변(李忭)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선조의 제 7왕자 인성군의 처가 되었다.[「윤승길비명」] 윤승길이 세상을 떠난 후 부인 반남 박씨가 남편을 따라서 죽기 위하여 본인 스스로 굶어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니, 자손들이 두 부부를 함께 장사지냈다. 나라에서 그 정절을 표창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하였다.[「윤승길시장」]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선원계보(璿源系譜)』
  • 『퇴당집(退堂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택당집(澤堂集)』
  • 『청선고(淸選考)』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미기사(癸未記事)』
  • 『고봉집(高峯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서애집(西厓集)』
  • 『수당집(修堂集)』
  • 『아계유고(鵝溪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조천기(朝天記)』
  • 『죽창한화(竹窓閑話)』
  • 『퇴계집(退溪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율곡전서(栗谷全書)』
  • 『사류재집(四留齋集)』
  • 『오리집(梧里集)』
  • 『하곡집(荷谷集)』
  • 『수몽집(守夢集)』
  • 『우복집(愚伏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구전집(苟全集)』
  • 『규창유고(葵窓遺稿)』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