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손(洪裕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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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2년(문종2)∼1529년(중종24) = 78세]. 조선 초기 성종~중종 시대의 중인 출신의 저항 시인.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 · 광진자(狂眞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매월당(梅月堂)김시습(金時習)과 절친한 사이였고,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다. 세조와 연산군에 저항한 조선 초기 <죽림 7현(竹林七賢)>의 중심 인물이었다.

성종~중종 시대 기인의 삶

어릴 때부터 글을 읽어서 경(經) · 사(史)를 섭렵하였고,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원각사(圓覺寺)에서 승려에게 불경을 배우다가 김시습을 만났고, 서거정(徐居正)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저항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전국을 방랑하였다. 한곳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호방한 성격을 지닌 홍유손은 김시습을 따라 다니며 그에게 저항적인 시를 배우고 현실도피적인 삶을 익혔다. 김시습이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으므로, 서울의 명사들은 홍유손과도 교제하려고 하였다. 그는 남양의 아전으로 있었는데, 그가 30세가 되던 해인 1481년(성종12)에, 남양군수로 부임한 채수(蔡壽)가 그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그의 향역(鄕役)을 면제시켜 주었다. 고통스럽게 여기던 향리의 구실에서 벗어나자, 그는 자유롭게 방랑하면서 자기를 수양하여 유불선(儒佛仙)의 이상 세계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였다.(『후청쇄어(鯸鯖瑣語)』)

그는 경상도로 김종직을 찾아 가, 그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때 김종직은 “이 사람은 이미 안자(顔子)가 즐긴 여유를 알고 있으니, 학자들은 모두 본받을 만하다.”라고 칭찬하였다. 그는 성리학으로 도학(道學)을 닦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 선교(仙敎)와 불교(佛敎)를 아울러 수양하여 나름대로 유불선의 이상 세계를 구축하였다. 서울로 돌아와서 위로는 왕가와 사대부들과 교유하고, 아래로는 시중의 상인과 서민들을 상대하여 자기의 유불선의 이상 세계를 설파하였다. 김수온(金守溫) · 김시습 · 남효온(南孝溫) 등과 특히 가깝게 지내며,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의 <죽림 7현(竹林七賢)>을 본 떠, 노자(老子) · 장자(莊子)의 학문을 토론하고, 고답(高踏)한 시율(詩律)을 즐겼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서 김종직의 제자들이 화를 당하였는데, 유자광(柳子光)이 <죽림 7현>을 거론하는 바람에, 그도 제주도의 관노(官奴)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온 그는 주변의 권유로 1510년(중종5) 59세로 사마시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다.(『방목』) 이후에 명산대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전국을 방랑하다가 1529년(중종24)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8세였다. 참의김헌윤(金憲胤)과 홍언필(洪彦弼)의 사위인 윤진(尹珍) 등 그의 문인들이 비용을 마련하여 경기도 양주(楊州) 불암산(佛巖山)에 그를 장사지냈다.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4)

저서로는 『소총유고(篠叢遺稿)』가 있다.

방랑 시인 홍유손

홍유손이 어렸을 적에 원각사에서 기거하며 불경을 읽고 있었다. 어느 날 김수온과 서거정 등이 조정에서 퇴근하는 길에 절 구경을 왔다가, 홍유손이 시를 잘 짓는다는 말을 듣고, 시험삼아 불러서 운(韻)을 부르니, 어린 홍유손이 메아리처럼 즉시 응수하였다. 그 시 중간 연구(聯句)에 “청산녹수는 우리 집의 땅인데, 그 누가 명월청풍을 주장하나.[靑山綠水吾家境 明月淸風孰主張]”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를 듣고 서거정뿐만 아니라 같이 동행하였던 김시습도 눈물을 글썽이며 감탄하였다. 이때부터 홍유손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그 시대의 명공거경들은 모두 홍유손과 사귀기를 원하였고, 후진 선비들은 시를 지어 반드시 그의 품제(品題)를 받으려고 하였다.

그는 김시습을 따라서 전국의 산수가 좋은 명승지를 찾아서 방랑하였다. 홍유손은 김시습을 문학의 스승으로 모시고 다녔는데, 서로 부자처럼 사이가 좋았다. 남효온이 금강산을 유람한다는 말을 듣고 한발 앞서 가 높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절벽에 시를 지어 쓰기를, “단군이 즉위한 무진년(戊辰年)보다 앞서 태어나서, 기자가 국호를 마한이라 한 걸 보았네.[生先檀帝戊辰歲 眼及箕王號馬韓] 머물다가 영랑(永郞)과 함께 수부(水府)를 유람하다가, 우연히 봄철 술을 마시고 인간 세상에 머물도다.[留與永郞遊水府 偶牽春酒滯人間]” 하였다. 여기서 영랑은 신라 화랑의 이름이다. 두 사람이 시를 다 쓰고 내려와서, 타고 올라갔던 나무를 베고 뿌리를 뽑아버렸다. 나중에 남효온이 그곳에 이르러, 올라갈 수 없는 절벽에 시가 쓰인 것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날아다니는 신선[飛仙]”이 지은 시라고 생각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 권18) 남효온은 홍유손을 고상하게 살면서 영리(榮利)를 추구하지 않는 ‘은군자(隱君子)’라고 칭찬하였으며, 그의 문학에 대해 평하기를, “문(文)은 칠원(漆園)과 같고, 시(詩)는 산곡(山谷)을 섭렵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칠원은 옷나무 숲속에 살았던 고대의 장자(莊子)를 말하고, 산곡은 송(宋)나라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호(號)이다.

성품과 일화

홍유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얽매이는 것이 없었다. 사람됨이 남보다 돋보이고 기상이 높고 훌륭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옷은 겨우 몸만 가리고 다닐 정도였다.(『해동잡록(海東雜錄)』권1)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장사 때에 무덤을 만들면서 몸소 흙을 져서 나르고 남을 시키지 않았다.(『성호사설(星湖僿說)』 권14) 그가 한창 문명(文名)을 날릴 때, 유자광으로부터 만나자는 청이 있었으나,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 보복으로 유자광은 <무오사화> 때 옥사가 끝났는데도, 일부러 <죽림 7현>을 거론하여, 홍유손 일당이 시정(時政)을 비방하였다고 무고하여, 그를 제주로 유배하였다.

그는 신숙주(申叔舟)의 손자 신용개(申用漑)와도 오래도록 문묵(文墨)으로써 교제하였다. 1647년(세조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함경도관찰사였던 신용개의 아버지 신면(申㴐)이 아전의 밀고로 죽게 되자, 신용개는 그 아전에게 원수를 갚고자 하였는데, 홍유손은 신용개가 원수를 갚는 것을 돕기로 약속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신용개가 원수를 갚을 때 홍유손이 도왔다고 하였으나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는 북도(北道)로 가는 인편을 구하지 못하여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의 「유사(遺事)」에서는 그가 나이 76세에 비로소 아내를 얻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고 하고, 또 다른 글에서는 99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늙어서 아들을 둘을 두었는데, 맏아들 홍지선(洪至善)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둘째 아들 홍지성(洪至誠)이 아버지 학문을 계승하여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으므로, 홍지성만이 알려졌다. 『계곡만필(谿谷漫筆)』을 보면, “홍유손은 1452년(문종2) 임신년에 태어나서 1529년(중종24) 기축년에 죽었으므로, 78세의 수명을 누렸으니, 아들 홍지성이 태어났을 때 그가 이미 늙은 몸이었다고 하더라도 90세 운운하는 것은 망령된 말이라 하겠다.”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 불암산에 있는데, 그가 죽은 지 70여 년이 지나서 우계(牛溪)성혼(成渾)이 지은 유사가 남아 있다. 전국을 방랑하다가, 늙어서 부인 조씨(趙氏)를 만나서 아들 2명을 낳았는데, 장남은 홍지선이고, 차남은 홍지성이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소총유고(篠叢遺稿)』
  • 『계곡만필(谿谷漫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계만록(松溪漫錄)』
  • 『송와잡설(松窩雜說)』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율곡전서(栗谷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후청쇄어(鯸鯖瑣語)』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추강집(秋江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