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남(朴孝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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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3년(명종 8)~1611년(광해군 3) = 59세]. 조선 중기 선조~ 광해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좌랑(佐郞)이다. 자는 자순(子順)이고, 호는 일암(一菴)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아버지는 장단부사(長湍府使)박옹(朴顒)이고, 어머니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최여집(崔汝楫)의 딸이다. 박옹은 박희정(朴希貞)의 아들인데, 박세정(朴世貞)의 양자가 되었다.

선조 · 광해군 시대 활동

1579년(선조 12)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 1591년(선조 24)에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당시 무고를 당한 재상을 구해줄 것을 상소하였다. 1601년(선조 34)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그를 아끼던 이가 사원(史院)에 있으면서 그를 극력 추천하였다. 그런데 그가 시론(時論)을 크게 거슬렸기 때문에 그를 추천한 사람이 이로 인해 파직되었고, 그도 성환찰방(成歡察訪)으로 나갔다. 그 뒤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결성현감(結城縣監)으로 나갔는데, 이때 크게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 백성이 비를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9월에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호조 정랑(正郞), 형조 정랑, 공조 정랑으로 전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봄에 태천현감(泰川縣監)이 되었다. 그 이듬해인 1611년(광해군 3)에 그가 병(病)이 나 돌아오는 도중에 병환이 위독해져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태천의 백성들도 결성(結城)의 백성들처럼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고, 매년 봄철과 가을철에 고장의 남녀노소가 서로 이끌고 나와서 경건하게 제사를 지냈다.

성품과 일화

박효남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단정하고 차분하였는데, 외모는 화평하고 내심은 강직하여 득실(得失)이나 영욕(榮辱)으로 인해 지조를 바꾼 적이 없었다. 벼슬살이 할 적에 안팎이 정숙하여 한결같았다. 성품이 또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더불어 노니는 사람은 한 시대 명인(名人) 몇 사람뿐이었다. 그의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 났는데, 그가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 미처 봉양하지 못한 것을 매우 한스러워하여 힘을 다해 어머니를 섬기되,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극도로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정이 비록 매우 빈한하였으나, 어머니를 봉양함은 반드시 후하고 극진하게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京畿道) 파주(坡州)에 있었는데, 뒤에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손곡(孫谷)으로 이장하였다. 김유(金瑬)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첫째부인 김씨(金氏)는 군수(郡守)김변(金汴)의 딸인데, 아들 박추(朴簉)를 두었다. 둘째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는 병절교위(秉節校尉)정희준(鄭希浚)의 딸인데,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서(朴遾)이고, 2자는 박진(朴進)이며, 3자는 박매(朴遇)이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계전서(沙溪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