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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6 기준 최신판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예를 표하기 위하여 보내는 포목(布木).

개설

관아나 군대에서 고참이 된 사람들이 신참에게 일종의 인사비 형태로 재물을 거두었는데, 이것을 예목(禮木)이라고 하였다(『영조실록』 30년 6월 5일). 예의를 차린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확산되어 중앙관사의 하졸들이 일용잡물을 충당하기 위하여, 더 나아가 중앙관사의 재정 확보 차원에서 예목을 거두었다.

내용 및 특징

18세기에 이르면 중앙관사의 서리들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새로 임명된 수령이나, 연초에 지방에서 궁궐에 숙배(肅拜)하러 올라온 정조호장(正朝戶長)에게서 예목을 거두었다. 예목은 종이·붓·땔감·등불 기름 등의 일용물이었다. 이 밖에도 지방에서 관인(官印)이 닳아서 바꿀 때에도 개인예목(改印禮木)이라고 하여 면포 15필을 거둔 적도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면 하졸들의 뇌물에 해당되는 정채(情債)와 함께 예목을 지나치게 거두어 민폐의 요인이 되었다. 아예 예목이 중앙관사의 세원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특히 수령이 교체될 때 막대한 예목을 요구하여 지방관청은 큰 재정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변천

이에 지방관청에서는 경각사(京各司)의 연례복정(年例卜定)·제반구청(諸般求請)과 함께 수령이 새로 임명될 때 갖춰야 할 당참(堂參)·예목(禮木)·잡비(雜費) 등의 명색을 모두 민고(民庫)에서 내었다. 경각사에 내는 예목·약채(藥債)·필채(筆債)·계병채(稧屛債)·벌례전(罰例錢)·사검채(舍檢債)·포진채(鋪陳債)·단자채(單子債) 등 역시 지방관청에서 부담하였다.

한편 여러 고을의 경저리들은 수령이 새로 부임할 때 내는 행하예목(行下禮木)과 기타 무명지징(無名之徵)으로 지탱하지 못하고 도산할 지경이었다. 이에 예목 및 예채(例債)를 탕감해 줄 것, 외직 수령들이 예목을 바치는 것을 금지할 것 등이 거론되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19세기 말 고종대에는 아예 요구하는 쪽이나 내야하는 쪽 양쪽의 예목을 정례화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가령 중앙각사가 전라도 삼례역에 요구한 예목에 대하여 의정부에서 마련한 절목에 의하면, 무려 28개 기관에 26개 명목의 예목이 열거되어 있었다.

예의를 차린다는 차원에서 징수하기 시작한 예목이 19세기에 들어서면 아예 중앙관청의 재원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무명잡세를 양산하는, 세정 문란의 주범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삼례역각사행하례목신정절목(參禮驛各司行下禮木新定節目)』
  • 『홍문관각도행하례목신정절목(弘文館各道行下禮木新定節目)』
  • ⋇사진 : 경 각사에서 삼례역에 행하한 예목(『參禮驛各司行下禮木新定節目』, 奎 3494, 18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