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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덕궁에 있던 정종과 그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왕과 왕후가 승하하는 시기는 대부분 다르므로 각자 혼전을 설치하여 혼전명 역시 따로 지었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왕후가 먼저 죽어 혼전이 설치되어 있으면, 왕이 승하하여 산릉에 시신을 매장한 다음 혼전에 왕후의 신주와 함께 봉안하여 하나의 혼전을 사용하기도 했다.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문소전(文昭殿),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광효전(廣孝殿) 등이 그러하였다.

인덕전은 정종과 정안왕후의 혼전이다. 정안왕후가 1412년(태종 12)에 승하하여 신주를 인덕전에 봉안하였고, 1419년(세종 1)에 정종이 승하하자 정종의 신주도 반혼(返魂)한 뒤 이곳에 봉안하였다. 정종의 3년 상제가 끝난 뒤 종묘에 함께 부묘하였다.

내용 및 특징

1412년(태종 12) 6월 25일에 정안왕후가 승하하고, 3개월 뒤 8월에 후릉(厚陵)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태종실록』 12년 8월 10일). 이때 인덕궁(仁德宮)에 조성한 혼전명이 인덕전이다. 정안왕후의 신주는 정종이 승하하고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할 때까지 인덕전에 봉안하였다.

인덕전은 인덕궁 안에 있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그 위치를 분명하게 알지 못해 혹자는 경복궁 안에 있다고 하고, 국초에는 이궁(離宮)의 궁호였다고 쓰여 있다.

1419년(세종 1) 9월 26일 정종이 인덕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고, 인덕궁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인 1420년(세종 2) 1월에 후릉에 재궁을 내린 뒤 반우하여 인덕궁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세종실록』 2년 1월 5일).

이후 정종의 장례는 초우제를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재우제(再虞祭)를 동파역(東坡驛) 앞들에서 지낸 뒤 삼우제(三虞祭)부터 혼전에서 지냈다. 이후 인덕전에서 칠우제(七虞祭)까지 지내고 졸곡제(卒哭祭),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1421년(세종 3) 12월 18일 정종과 정안왕후의 신주를 인덕전에서 옮겨 와 태묘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인덕전은 정안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412년 8월 10일부터 종묘에 부묘한 1421년 12월 18일까지 인덕궁 인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인덕궁과 인덕전은 조선초기까지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보이고 그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참고문헌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종묘의궤(宗廟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현진, 「조선 왕실의 혼전」,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