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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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5 기준 최신판



남의 과실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권면하는 규계(規戒)의 뜻을 담은 문체.

개설

한나라 때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잠(箴)은 원래 ‘침(鍼)’자였다고 한다. 의원이 침으로 병을 치료하듯이, 잠언(箴言)으로써 사람의 잘못을 예방하고 치유도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잠’의 기원은 오래되어서, 「하잠(夏箴)」 및 「상잠(商箴)」의 일부가 『일주서(逸周書)』와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실려 있다.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잠 중에서 오래된 작품은 『좌전(左傳)』에 수록되어 있는 「우인지잠(虞人之箴)」이다. 줄여서 「우잠」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주나라의 태사신신(辛申)이 무왕의 과실을 바로잡으려고 백관에게 짓게 한 잠 가운데 하나이다. 후한의 양웅(揚雄)은 「우잠」을 모방해서 「십이주목잠(十二州牧箴)」과 「이십오관잠(二十五官箴)」을 지었다. 관잠 9편이 없어졌으나, 후한의 최인(崔駰)과 그 아들 최원(崔瑗)이 16편을 증보하고 또 호광(胡廣)이 4편을 더 지었다. 12주잠과 합하여 총 48편을 통틀어 ‘백관잠(百官箴)’이라고 한다. 양한과 진(晉)나라 때는 남을 경계하는 관잠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당나라 때 이후로는 스스로를 경계하는 사잠(私箴)이 많이 창작되었다. 「유잠(游箴)」·「언잠(言箴)」·「행잠(行箴)」·「호오잠(好惡箴)」·「지명잠(知名箴)」으로 이루어진 한유(韓愈)의 「오잠(五箴)」이 그 대표적인 예다.

내용 및 특징

잠은 본래 낭송하는 것이고 명(銘)은 기물에 쓰는 것이라서 그 둘은 명칭과 용도가 다르다. 하지만 사람을 경계한다는 목적은 동일하다.

잠의 목적은 과실을 예방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문장은 확실하고 적실해야 한다. 조선 세조 때 정척(鄭陟)은 상소를 올려, 지방 수령으로 하여금 잠을 읽게 하여 다스림의 도를 일으킬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5년 4월 20일).

잠은 완곡하게 비판하는 풍간(諷諫)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풍간의 효과를 높이고 기억하기 편리하도록 4언의 운문으로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시가의 경우처럼 운율의 제약이 엄격하지는 않다. 음절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산구(散句)를 섞기도 한다. 동진(東晋)의 벼슬아치였던 온교(溫喬)가 지은 「시신잠(侍臣箴)」은 스스로 어질다고 자만하거나 스스로 귀하다고 영화롭게 여겨서는 안 된다며 태자를 훈계한 글인데, 4언을 위주로 5언·6언·9언 등을 섞었다. 압운도 이구(二句)마다 각운(脚韻)을 다는 격구운(隔句韻), 매구(每句)마다 압운하는 연구운(聯句韻)을 자재로 사용했다.

변천

한유는 38세 때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오잠」을 지었다. 그 총서에서 그는 "사람은 자신의 결점을 모르는 것을 염려한다. 이미 알면서도 고칠 수 없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人患不知其過 旣知之不能改 是無勇也]"라고 하여, 『논어』에서 말한 회과(悔過)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다섯 잠언을 짓는다고 하였다.

북송의 유학자 정이(程頤)는 공자가 인(仁)을 묻는 안연(顔淵)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하고 그 조목으로 제시한 사물(四勿)을 근거로, 시(視)·청(聽)·언(言)·동(動)에 대해 각각 경계하는 잠을 지었다. 이것을 「사물잠(四勿箴)」이라고 한다. 송나라 남당(南塘) 진백(陳柏)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지은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잠을 지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 말기의 학자인 이달충(李達衷)은 「애오잠(愛惡箴)」에서 세간의 시비와 애오에 휘둘리지 않는 평담한 자세를 취하겠다고 다짐했다. 문체는 같은 어구들을 얽어 쓰는 착종법을 활용했다. 조선시대의 명편으로 꼽히는 이황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과 정약용의 「한사잠(閑邪箴)」은 모두 인간 수양과 관련하여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 심경호, 『한문산문의 미학』(개정증보),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