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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4 기준 최신판



17세기 전반에 왕실의 사적인 경비 충당을 위하여 마련된 재정기구로, 명례궁·어의궁·수진궁·용동궁의 네 궁을 말함.

개설

조선전기의 궁방은 단순히 후궁·대군·공주·옹주 등의 존칭이었다. 하지만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각 궁방마다 생계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에 토지나 어전·염분 등을 절수(折受)하여 거기에서 생긴 소득으로 각 궁방을 운영하였다. 절수로 준다는 것은 소유권이 아닌 해당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을 의미하였다. 궁방이 재정 운영의 주체가 된 것이었다. 이러한 궁방 중에서 왕비와 왕대비·세자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된 궁이 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수진궁(壽進宮)·용동궁(龍洞宮)으로 대표되는 4궁이었다. 이 궁은 후손이 없이 죽은 왕자의 재산이나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소유하던 재산으로 마련되었다. 4궁의 관리는 주로 내시와 상궁 또는 그 일족이 담당하였다. 4궁의 수입은 친척들에게 선물을 주거나 기타 법에서 정한 이외의 경비에 사용되었다. 4궁은 왕의 사적인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기구인 내수사(內需司)와 동등한 위상을 지닌 왕실의 재정기구로, 1907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

4궁은 비록 법전에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계층별로 업무가 분담되는 정연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4궁의 관리를 담당한 상부 계층은 대체로 내시와 상궁이었고, 실무자는 상부 계층의 일족으로 구성되었다. 또 잡역을 담당한 하부 계층은 노비와 유사한 형태로 존재하였다. 이들은 궁의 내부 또는 인접한 지역에 살면서 일종의 국역 체제를 형성하였다.

4궁의 존재는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조선왕조는 ‘궁부일체(宮府一體)’의 이념에 따라 재정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왕실 재정까지 정부 재정에 제도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왕실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물자들은 정부 재정을 통해서만 공급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정부 재정을 통해 공급되는 물자들은 고정되어 있었으나, 왕실에서는 혼인과 같은 일시적인 수요 팽창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왕과 왕실은 이러한 돌발적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별도의 재정기구가 필요하였다. 특히 직전법이 폐지된 이후에는 그 필요성이 더욱 증대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 4궁이었다. 그러나 4궁의 존재와 4궁에 대한 왕의 특혜조치는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궁부일체의 이념을 고수하고 정부의 재정을 확보하려는 관료들에 의해 4궁의 재정을 제한하고자 하는 의견이 자주 제기되었다. 그러나 왕실 재정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왕에 의해 1907년에 비로소 폐지되었다.

변천

원래 대비전이나 왕비전 등의 사적 경비는 내수사 장리(長利)를 통해 얻게 된 재원으로 충당하였다. 그런데 1516년(중종 11) 내수사 장리가 혁파되면서 대비전 등이 재정에 타격을 입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명종대까지는 내수사의 위상을 강화하고, 여기에서 얻어진 재원을 대비전 등에서 사용하였다. 한편 왕은 즉위와 함께 잠저 시에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모두 내수사로 이속하였다.

그런데 인조반정 이후 변화가 생겼다. 우선 인조와 효종의 잠저였던 어의궁은 그 재산이 내수사로 이속되지 않았다. 어의궁의 재산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대비전 등의 사적인 비용을 충당하는 기구로 유지되었다. 또 수진궁은 원래 예종(睿宗)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의 궁이었다. 그런데 제안대군이 후사가 없이 죽자, 후사가 결정될 때까지 그 집 재산을 내수사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이후 영창대군이 제안대군의 후사로 결정되면서, 재산의 관리 주체가 내수사에서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에게로 옮겨졌다. 한편 인조대에 들어서면서 수진궁은 대비전에 소속되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 명례궁도 대비전에 소속된 궁으로 나타났다. 명례궁은 월산대군의 궁이었고, 현재의 덕수궁이다. 그리고 이 궁은 인목대비가 광해군 때 유폐되었던 서궁이기도 하였다. 인목대비와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두 궁의 재산이 모두 인조대에 인목대비를 위한 사재정기구로 나타나는 것이다.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의 궁이었던 용동궁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왕비의 사재정기구로 성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인조반정 이후 내수사와 동등한 위상을 갖는, 대비전의 사재정기구로 4궁이 성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4궁은 특정 대비전이나 중궁전과 같은 특정 궁에 고정적·불변적으로 소속되지는 않았다. 시기에 따라 왕대비나 대비·세자와 같은 왕실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그 소속처도 달라졌다. 예를 들어 명례궁의 경우, ‘자전(慈殿)→중궁전(中宮殿)→대비전(大妃殿)→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양자전(兩慈殿)→동궁(東宮)’으로 시기에 따라 수시로 그 소속처가 바뀌었다. 이들 4궁은 1907년에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송수환, 『조선전기 왕실재정 연구』, 집문당, 2000.
  • 이욱, 「인조대 궁방·아문의 어염절수와 정부의 대책」, 『역사와 현실』 46, 한국역사연구회, 2002.
  • 조영준, 「조선후기 궁방의 실체」, 『정신문화연구』 31-3 ,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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