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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법주사|한글표제=법주사|한자표제=法住寺|대역어=|상위어=교종(敎宗), 삼십육사(三十六寺)|하위어=|동의어=길상사(吉祥寺), 속리사(俗離寺)|관련어=상환암(上歡庵), 복천암(福泉庵), 벽암각성(碧巖覺性), 영빈이씨(暎嬪李氏), 원당(願堂)|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충청북도 보은군|시대=삼국~조선|왕대=|집필자=김용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36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5_002 『세종실록』 6년 4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906020_002 『세조실록』 9년 6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002028_001 『세조실록』 10년 2월 28일],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12020_001 『성종실록』 24년 12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302023_001 『인조실록』 13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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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대표표제=법주사|한글표제=법주사|한자표제=法住寺|대역어=|상위어=자복사(資福寺)|하위어=|동의어=|관련어=심지(心知), 은점(恩霑), 조계종(曹溪宗), 은해사(銀海寺), 자복사찰(資福寺刹), 육문(六文),|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시대=신라~현대|왕대=|집필자=윤기엽|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28|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원당으로, 충청북도 보은군속리산에 위치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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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경상북도 군위군청화산에 있는 절.
  
 
=='''개설'''==
 
=='''개설'''==
  
법주사(法住寺)는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속리산(俗離山)에 위치하며 조선시대에는 주로 속리사(俗離寺)로 칭해졌다. 세종대 선·교 양종 가운데 교종 18개 사찰에 포함되었고 조선시대 왕실의 주요 [[원당(願堂)]]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후기에도 사격이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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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法住寺)는 신라 때 창건되었으며, 고려후기에 일연이 [[총림(叢林)]]을 설치하였고,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 인조 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후 몇 차례의 중건이 있었다. 현재는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1998년 육문(六文)이 주지로 부임하여 비구니선원 개원불사(開院佛事)를 추진하였고, 최근 청화선원 등을 완공했다.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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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및 변천'''==
  
삼국시대인 553년(백제 성왕 31)에 의신(義信)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의신이 서역에서 경전[法]을 전래해 와 머물렀다[住]는 전설에서 법주사라는 사찰 명칭이 유래하였다. 이후 진표(眞表)가 제자 영심(永深) 등에게 속리산에 가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지으라고 하여 776년(신라 혜공왕 12)에 중창하였고 [[길상사(吉祥寺)]]로 칭했다고 한다. 1101년(고려 숙종 6) 숙종이 동생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을 위한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푼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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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건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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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소지왕 때 심지(心知) 또는 은점(恩霑)이 창건했다고 전해오나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이어서 신빙성이 없다. 801년(신라 애장왕 1)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주석했고 일연(一然)이 [[총림(叢林)]]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고려후기 법주사의 사세(寺勢)를 짐작하게 해준다.
  
법주사는 조선시대에는 주로 속리사로 불렸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태조는 부속 암자인 상환암(上歡庵)에서 기도하였고 세조는 복천암(福泉庵)에서 치병을 위한 법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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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시대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법주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법주사는 당시 보은 속리사로 칭해졌는데 원래 보유하고 있던 토지 60결에 140결이 추가 지급되어 200결이 인정되었고 거주하는 승려는 100명으로 정해졌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5_002 『세종실록』 6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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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태종 7) 12월, 군위(軍威) 법주사(法住寺)가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12002_002 『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군위 법주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하여 지정한 사찰이었다. 고려후기에 융성했던 법주사가 조선 초에도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충청도 지역인 충주의 [[보련사(寶蓮寺)]]는 소유 전답 80결에 70결이 더해져 150결이 되었고 거주 승려는 70명으로, 법주사의 위상과 규모가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36개 사찰의 대부분이 도 단위 이상에서 지정되었고, 그 중 20개 이상이 왕실 관련 사찰로서 적극적인 보호와 후원을 받았다. 『세종실록』「지리지」 보은현 항목에서는 속리산은 명산이며 신라시대에는 속리악으로 칭해졌고 [[중사(中祀)]]의 하나였다고 기술하면서, 그 서쪽에 속리사가 위치하며 교종 소속 사찰로 토지 200결이 지급되었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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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인조 1) 화재로 소실되었고, 1660년(현종 1)에 재건하였다. 1690년(숙종 17) 보광명전을 중건했다.
  
숭불 군주였던 세조대에는 성균관 유생 최유숙(崔有淑)이 속리사 승려 혜등(惠登)이 입적하자 그의 사리 3매를 바친 일이 있었고([http://sillok.history.go.kr/id/kga_10906020_002 『세조실록』 9년 6월 20일]), 세조 자신이 친히 속리사에 행차하여 쌀과 콩 30석을 하사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1002028_001 『세조실록』 10년 2월 28일]). 한편 억불 정책을 이어간 성종대에는 속리사 승려가 본사의 [[전세(田稅)]]를 거둘 때 함부로 외람된 짓을 저지르고 도망간 일도 있었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12020_001 『성종실록』 24년 12월 20일]), 당시까지 보유 전지가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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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대
  
법주사는 임진왜란 전소되었는데, 현존하는 목탑 형식의 팔상전(八相殿)은 1605년(선조 38)에 재건되었고, 대웅전(大雄殿) 대부분의 사우는 1624년(인조 2)에 남한산성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던 벽암각성(碧巖覺性)이 중창하였다. 각성은 전주[[송광사(松廣寺)]], 구례[[화엄사(華嚴寺)]] 등 호남과 호서 일대의 사찰 중창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이후 1650년에 세워진 세존사리비에는, 이 절의 사리탑이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세워졌고 공민왕이 [[통도사(通度寺)]]에 있는 불사리 1과를 옮겨 봉안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인조대에는 6장(약 18m) 높이의 불상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고([http://sillok.history.go.kr/id/kpa_11302023_001 『인조실록』 13년 2월 23일]), 비슷한 사례는 효종대에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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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보광명전의 용마루를 중수할 『화엄경』, 『법화경』, 『전등록』 귀중한 불교 경서가 많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본당 서편에 손상된 불상인 파불(破佛) 15좌를 매몰하고 5불상은 대법당 앞에 매몰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화재나 재난을 당하기 전 이 절의 규모가 매우 웅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역대 조사들의 진영이 봉안된 조사각(祖師閣)은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원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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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1998년 육문이 주지로 부임한 후 비구니선원 개원불사(開院佛事)를 추진하여 그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다. 2001년 보광명전을 새로 건립하고, 2003년 명부전과 산신각을 세웠다. 최근에 설선당, 청화선원 등을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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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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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왕맷돌(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2호)은 국내에서 발견된 맷돌 중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절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암돌, 숫돌 모두 지름 115㎝, 두께 15.5㎝의 크기에 구멍이 4군데나 뚫려 있는 원형의 석조물이다. 약 300년 전인 조선후기 때 만들어진 맷돌로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 법주사의 사세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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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5층석탑(法住寺 五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호)은 높이 3.56m의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쌓은 탑이다. 현재 위층 기단과 탑신의 4층 몸돌·지붕돌이 없는 상태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석탑이라고 전해온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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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연구소 편, 『문화유적총람』, 1977.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관계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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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9 판



태종대 88개 자복사 가운데 하나로, 경상북도 군위군청화산에 있는 절.

개설

법주사(法住寺)는 신라 때 창건되었으며, 고려후기에 일연이 총림(叢林)을 설치하였고, 조선 태종 때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 인조 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후 몇 차례의 중건이 있었다. 현재는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1998년 육문(六文)이 주지로 부임하여 비구니선원 개원불사(開院佛事)를 추진하였고, 최근 청화선원 등을 완공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신라 소지왕 때 심지(心知) 또는 은점(恩霑)이 창건했다고 전해오나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이어서 신빙성이 없다. 801년(신라 애장왕 1)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주석했고 일연(一然)이 총림(叢林)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고려후기 법주사의 사세(寺勢)를 짐작하게 해준다.

(2) 조선시대

1407년(태종 7) 12월, 군위(軍威) 법주사(法住寺)가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당시 조선시대의 불교 종파는 이전의 11개(혹은 12개)에서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등 7개 종파로 정리되었는데, 군위 법주사는 조계종에 소속된 자복사찰이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하여 지정한 사찰이었다. 고려후기에 융성했던 법주사가 조선 초에도 지방의 명찰(名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1623년(인조 1) 화재로 소실되었고, 1660년(현종 1)에 재건하였다. 1690년(숙종 17) 보광명전을 중건했다.

(3) 현대

1977년 보광명전의 용마루를 중수할 때 『화엄경』, 『법화경』, 『전등록』 등 귀중한 불교 경서가 많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본당 서편에 손상된 불상인 파불(破佛) 15좌를 매몰하고 5불상은 대법당 앞에 매몰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화재나 재난을 당하기 전 이 절의 규모가 매우 웅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1998년 육문이 주지로 부임한 후 비구니선원 개원불사(開院佛事)를 추진하여 그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다. 2001년 보광명전을 새로 건립하고, 2003년 명부전과 산신각을 세웠다. 최근에 설선당, 청화선원 등을 완공했다.

문화재

법주사 왕맷돌(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2호)은 국내에서 발견된 맷돌 중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절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암돌, 숫돌 모두 지름 115㎝, 두께 15.5㎝의 크기에 구멍이 4군데나 뚫려 있는 원형의 석조물이다. 약 300년 전인 조선후기 때 만들어진 맷돌로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 법주사의 사세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다.

법주사 5층석탑(法住寺 五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호)은 높이 3.56m의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쌓은 탑이다. 현재 위층 기단과 탑신의 4층 몸돌·지붕돌이 없는 상태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석탑이라고 전해온다.

참고문헌

  • 문화재연구소 편, 『문화유적총람』, 197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