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上院寺)"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XML 가져오기)
1번째 줄: 1번째 줄:
  
  
{{개념용어|대표표제=상원사|한글표제=상원사|한자표제=上院寺|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진여원(眞如院)|관련어=오대산(五臺山), 자장(慈藏), 세조(世祖), 문수신앙(文殊信仰), 월정사(月精寺), 방한암(方漢巖),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 김수온(金守溫)|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시대=신라~현대|왕대=|집필자=한상길|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87|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10002_001 『태종실록』 1년 10월 2일],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02024_003 『태조실록』 4년 2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402006_002 『태종실록』  14년 2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02014_003 『예종실록』 1년 2월 14일]}}
+
{{개념용어|대표표제=상원사|한글표제=상원사|한자표제=上院寺|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태고보우(太古普愚), 효령대군(孝寧大君), 세종(世宗), 세조(世祖), 원찰(願刹), 구병수륙재(救病水陸齋)|분야=문화/종교/불교|유형=개념용어|지역=경기도 양평군|시대=고려말~조선초|왕대=|집필자=한상길|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86|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024_001 『세종실록』 32년 1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11001_002 『세종실록』 31년 11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3_002 『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10029_001 『세조실록』 8년 10월 29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11005_001 『세조실록』 8년 11월 5일]}}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수신앙 성지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오대산에 있는 절.
+
조선초기 효령대군의 원찰로, 경기도 양평군용문산에 위치한 절.
  
 
=='''개설'''==
 
=='''개설'''==
  
상원사(上院寺)는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태자가 진여원(眞如院)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고려후기에는 참선결사가 개설된 수행도량이었다. 조선초기에는 태조와 세조 등 국왕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국가의 수륙재를 열었고, 문수보살을 봉안하는 등 문수신앙의 명맥을 이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한암(漢岩) 스님이 죽음을 무릅쓴 용맹함으로 절을 유지하였다. 세조와 문수보살과의 인연을 간직한 문수동자상, 고양이상 등이 유명하다.
+
고려후기 태고보우(太古普愚)가 절의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12대 서원을 발원하였다. 이후 상원사(上院寺)는 관음신앙으로 유명하였다. 조선초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찰이 되었고, 세종과 세조 등 국왕이 행차하여 국가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세조는 절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영험을 경험한 후 각별하게 지원하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소실되어 역사적인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내용 및 변천'''==
+
=='''변천'''==
  
(1) 신라~고려시대의 상원사
+
(1) 고려시대
  
705년(신라 성덕왕 4) 진여원을 창건하였다. 이때 성덕왕은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산에 와서 전당(殿堂)을 세우고,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그리고 영변(靈卞) 등 5명에게 화엄사(華嚴社)를 결성하여 『화엄경』을 강독하도록 하였다.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이 산에서 가까운 주현(州縣)으로부터 창조(倉租) 100석과 정유(淨油) 1섬을 바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후기의 『태고화상어록부록(太古和尙語錄附錄)』의 유창(維昌)이 쓴 「이웅존자시원증행장(利雄尊者諡圓證行狀)」으로, 1330년(고려 충숙왕 17) 태고보우가 상원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12대 서원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보우가 상원사에 언제부터 얼마 동안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1333년 가을부터는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있었으므로 그 이전으로 짐작된다.
  
고려후기인 1381년(고려 우왕 7) 무렵에 이색(李穡)이 지은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를 통해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다. 1376년(고려 우왕 2) 절은 승당조차 없을 정도로 퇴락해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나옹의 제자 영로암(英露菴)[[판서(判書)]]최백청(崔伯淸) 부부가 힘을 모아 1년여 만에 승당을 완공하였다. 승당이 갖추어지자 승려 33명이 모여 10년간의 참선결사를 조직하였다. 결사 수행을 행한 지 5년째인 1381년 촛불이 불을 붙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밝아지는 영험이 나타났다고 한다.
+
조선 건국 초인 1398년(태조 7)에는 조안(祖眼)이 중창하였다. 조안은 정지 국사 지천(智泉)의 제자로 1395년에 스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를 중창한 인물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는데 당시의 가람 규모 등은 일체 전하지 않는다.
  
(2) 조선시대의 상원사
+
(2) 조선시대
  
조선시대 들어 상원사는 국왕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받았다. 조선은 억불숭유의 정치 이념을 내세우며 불교를 탄압하였지만 국왕과 왕실은 돈독한 신앙심으로 여러 사찰의 중창을 지원하였다.
+
절의 역사는 조선초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1450년(세종 32) 왕은 정효강(鄭孝康)을 절에 보내 구병수륙재(救病水陸齋)를 베풀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024_001 『세종실록』 32년 1월 24일]). 수륙재는 뭍과 육지의 외로운 중생을 구제하는 법회인데, 구병수륙재라고 하여 세자의 치병을 기원하였다. 세자 즉 문종이 병약하여 세종은 한 해 전에도 대자암(大慈菴)에서 약사재(藥師齋)와 수륙재를 개설한 일이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11001_002 『세종실록』 31년 11월 1일]). 상원사 수륙재 때 왕은 『불정심다라니(佛頂心陁難哩)』를 간행하고, 아미타경, 관음경 등을 사경하여 신하들에게 세자의 완쾌를 기원하는 독경을 권하였다.  
  
상원사는 조선 건국 초부터 국가가 주관하는 법회를 자주 개설하였다. 태조는 1398년(태조 7) 8월에 천재지변을 물리치는 법석(法席)을 상원사에 개설하도록 하였다. 1401년(태종 1) 봄 태종은 상원사의 사자암(獅子庵: 현 중대암)을 중창하였다. 태종은 불사가 완공된 후, 그해 11월에 친히 행차하여 낙성식을 개최하였다. 또한 권근(權近)에게 중창기를 써서 오랫동안 후세에 알리도록 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절에서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개설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10002_001 『태종실록』 1년 10월 2일]). 수륙재는 뭍과 물의 외로운 영혼을 천도하는 영혼 천도 의식이다. 1395년(태조 4) 10월 [[삼화사(三和寺)]]·관음굴(觀音堀)·견암사(見巖寺) 등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국가가 주관하는 수륙재를 개설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02024_003 『태조실록』 4년 2월 24일]).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몰살시킨 고려 왕족의 명복을 기원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태조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몰살시킨 고려 왕족들의 명복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
세종과 상원사의 인연은 효령대군에게서 비롯된 듯하다. 효령은 태종의 둘째아들이므로 세종의 형이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회암사(檜巖寺)]], [[흥천사(興天寺)]] 등의 중건에 기여하였고, 여러 경전의 언해·간행에 참여하였다. 조선초 왕실의 돈독한 불교신앙은 대부분 그의 영향을 받았다. 1452년(단종 즉위) 당시 효령대군의 [[농장(農莊)]]이 상원사 인근에 있었다. 이곳에서 종을 주조하여 절에 봉안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3_002 『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3일]). 이처럼 상원사는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그의 주선으로 세종이 구병수륙재를 개설했던 것이다.
  
이후 삼척 삼화사에 큰 불이 나서 수륙재 설행이 불가능해지자, 국가에서는 상원사를 수륙사로 지정해 매년 2월 15일에 국행수륙재를 지속적으로 개설하게 했고, 1414년(태종 14)부터는 1월 15일에 개설하도록 날짜를 변경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402006_002 『태종실록』  14년 2월 6일]). 이와 같이 상원사는 국가의 수륙재도량으로서 건국 초부터 국가의 관심과 지원을 받고 있었다.
+
절과 왕실과의 인연은 세조대에도 이어졌다. 1462년(세조 8)부터 여러 차례 국왕이 절에 행차하였고([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10029_001 『세조실록』 8년 10월 29일]), 이때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영험을 경험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11005_001 『세조실록』 8년 11월 5일]). 이때의 정황을 [[최항(崔恒)]]이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로 남겼다. 세조는 1462년 10월에 세자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상원사를 들르게 되었는데‚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종과 북소리‚ 범패 소리가 들렸다. 막상 절에 가보니 아무도 없는데 한순간 구름이 절 위로 솟아오르며 관세음보살상이 나타났다. 주변이 온통 금색으로 변하며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울리자 모두가 놀라 예배하였다. 세조가 상원사로 들어가니 담화전(曇華殿) 위에서 하얀 기운이 위로 솟아오르다가 흰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로 변하였다. 그 빛이 천지를 오랫동안 밝히다가 사라졌다. 세조가 경탄하며 향과 비단, 쌀 200석을 내리고 영의정[[신숙주(申叔舟)]]를 보내 공양하도록 하였다. 또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 봉안하고, 관음의 그림을 그려서 전국에 배포하였다. 아울러 살인·강도 이외의 죄를 사면하였다.
  
상원사는 세조(世祖)의 중창으로 다시 한 번 명찰로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466년(세조 12) 세조는 절에 나한전, 청련당, 종각 등을 건립하고 절의 각종 물품을 마련해 주었다. 자세한 이야기가 김수온(金守溫)이 쓴 「상원사중창기(上元寺重創記)」에 전한다. 1462년(세조 8) 4월 세조는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왕대비는 신미(信眉), 학열(學悅) 등의 조언을 듣고 세조에게 화재로 불탄 상원사의 중창을 권하였다. 세조는 왕실의 재원을 하사하여 불사를 명하고, 친히 공덕소(功德疏)를 지어 종친과 신하들에게 시주를 권하였다. 당시 신미가 쓴 「상원사중창권선문(上元寺重創勸善文)」은 지금까지 남아 보물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세조는 불사가 완성되자 친히 낙성회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거나 신령한 고양이가 세조의 목숨을 구했다는 등의 전설이 전한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자 다음 해 예종은 상원사를 세조의 명복을 기원하는 원찰로 정했다. 그리고 절을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잡역과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02014_003 『예종실록』 1년 2월 14일]).
+
이와 같이 조선초기 상원사는 효령대군의 원찰(願刹)로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이후의 역사는 잘 알 수 없다. 세종과 세조 등의 호불군주(護佛君主) 이후 억불 정책이 강화되면서 더이상 왕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조선후기인 1788년(정조 12)의 상원사 전경을 전하는 그림이 남아 있다. 단원김홍도는 이 해 9월 오대산과 금강산 등을 답사하며 70여 장의 산수화를 그려 『금강사군첩』을 남겼다. 이 중에 상원사와 월정사, 중대 적멸보궁, [[사고(史庫)]] 등의 그림이 들어 있다. 김홍도가 그린 상원사는 지금의 문수전을 중심으로 좌우의 행랑칸과 2층 누각, 요사 등의 단출한 가람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조선후기 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3) 근현대
 
(3) 근현대
  
근현대에 들어 상원사는 참선도량으로 거듭났다. 1904년에 선원을 개설하였고 1907년 수월 화상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방한암이 수행하면서 상원사는 오대산의 수행도량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선사는 1925년 상원사에 들어와 1951년 입적할 때까지 27년간을 산문 밖에 나가지 않고 참선 수행에만 전념하였다. 한암의 죽음을 무릅쓴 상원사 수호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1951년 1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국군은 북한군의 거점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오대산의 전 사찰을 소각시키고 상원사도 불태우려 하였다. 이때 한암 스님은 가사와 장삼을 입고 법당으로 들어가 좌정하고는 자신도 함께 불태우라고 하였다. 스님의 인품에 감화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태우고 돌아갔다.
+
절은 조선후기의 여러 지리서에 빠짐없이 이름이 보인다. 근대 들어 1907년 의병운동의 과정에서 전소되었고, 1918년 화송(華松)이 중건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용문산전투가 발발해 모두 소실되었다가 1969년 덕송(德松), 1970년 이후 경한(鏡漢) 등이 꾸준히 중건하였다. 가람은 대웅전과 삼성각, 용화전, 청학당 등으로 구성되었고, 효령대군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1984년에는 문수동자상의 복장물이 발견되어 절의 위상과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유물은 2개의 발원문과 복식, 전적류 등 23점(보물 제793호)인데 발원문에는 세조의 둘째딸인 의숙공주 부부가 1466년에 이 동자상을 문수사에 봉안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목은집(牧隱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식우집(拭疣集)』       
+
*『여지도서(輿地圖書)』       
*한국불교연구원, 『월정사 ()상원사』, 한국불교연구원 편, 1977, 일지사.      
+
*『가람고(伽藍攷)』     
*한상길, 『한국의 명찰 5 월정사』, 대한불교진흥원, 2009.       
+
*『태고화상어록부록(太古和尙語錄附錄)』     
*강호선, 「조선 태조 4년 국행수륙재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62,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3.       
+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     
*신종원, 「신라오대산사적과 성덕왕의 즉위배경」, 『최영희선생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1981.       
+
*사찰문화연구원 편집부, 『전통사찰총서 5, 인천·경기도의 전통사찰Ⅱ』, 1995.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이봉춘, 「조선초기 배불사 연구: 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관계망'''==
 
=='''관계망'''==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4487"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
<html><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14486"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강원도 평창군 오대산]][[분류:신라~현대]]
+
[[분류:문화]][[분류:종교]][[분류:불교]][[분류:개념용어]][[분류:경기도 양평군]][[분류:고려말~조선초]]

2017년 12월 10일 (일) 02:28 판



조선초기 효령대군의 원찰로, 경기도 양평군용문산에 위치한 절.

개설

고려후기 태고보우(太古普愚)가 절의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12대 서원을 발원하였다. 이후 상원사(上院寺)는 관음신앙으로 유명하였다. 조선초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찰이 되었고, 세종과 세조 등 국왕이 행차하여 국가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세조는 절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영험을 경험한 후 각별하게 지원하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소실되어 역사적인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변천

(1) 고려시대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후기의 『태고화상어록부록(太古和尙語錄附錄)』의 유창(維昌)이 쓴 「이웅존자시원증행장(利雄尊者諡圓證行狀)」으로, 1330년(고려 충숙왕 17) 태고보우가 상원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12대 서원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보우가 상원사에 언제부터 얼마 동안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1333년 가을부터는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있었으므로 그 이전으로 짐작된다.

조선 건국 초인 1398년(태조 7)에는 조안(祖眼)이 중창하였다. 조안은 정지 국사 지천(智泉)의 제자로 1395년에 스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를 중창한 인물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는데 당시의 가람 규모 등은 일체 전하지 않는다.

(2) 조선시대

절의 역사는 조선초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1450년(세종 32) 왕은 정효강(鄭孝康)을 절에 보내 구병수륙재(救病水陸齋)를 베풀게 하였다(『세종실록』 32년 1월 24일). 수륙재는 뭍과 육지의 외로운 중생을 구제하는 법회인데, 구병수륙재라고 하여 세자의 치병을 기원하였다. 세자 즉 문종이 병약하여 세종은 한 해 전에도 대자암(大慈菴)에서 약사재(藥師齋)와 수륙재를 개설한 일이 있었다(『세종실록』 31년 11월 1일). 상원사 수륙재 때 왕은 『불정심다라니(佛頂心陁難哩)』를 간행하고, 아미타경, 관음경 등을 사경하여 신하들에게 세자의 완쾌를 기원하는 독경을 권하였다.

세종과 상원사의 인연은 효령대군에게서 비롯된 듯하다. 효령은 태종의 둘째아들이므로 세종의 형이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회암사(檜巖寺), 흥천사(興天寺) 등의 중건에 기여하였고, 여러 경전의 언해·간행에 참여하였다. 조선초 왕실의 돈독한 불교신앙은 대부분 그의 영향을 받았다. 1452년(단종 즉위) 당시 효령대군의 농장(農莊)이 상원사 인근에 있었다. 이곳에서 종을 주조하여 절에 봉안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있었다(『단종실록』 즉위년 10월 13일). 이처럼 상원사는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그의 주선으로 세종이 구병수륙재를 개설했던 것이다.

절과 왕실과의 인연은 세조대에도 이어졌다. 1462년(세조 8)부터 여러 차례 국왕이 절에 행차하였고(『세조실록』 8년 10월 29일), 이때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영험을 경험하였다(『세조실록』 8년 11월 5일). 이때의 정황을 최항(崔恒)이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로 남겼다. 세조는 1462년 10월에 세자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상원사를 들르게 되었는데‚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종과 북소리‚ 범패 소리가 들렸다. 막상 절에 가보니 아무도 없는데 한순간 구름이 절 위로 솟아오르며 관세음보살상이 나타났다. 주변이 온통 금색으로 변하며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울리자 모두가 놀라 예배하였다. 세조가 상원사로 들어가니 담화전(曇華殿) 위에서 하얀 기운이 위로 솟아오르다가 흰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로 변하였다. 그 빛이 천지를 오랫동안 밝히다가 사라졌다. 세조가 경탄하며 향과 비단, 쌀 200석을 내리고 영의정신숙주(申叔舟)를 보내 공양하도록 하였다. 또 관세음보살상을 만들어 봉안하고, 관음의 그림을 그려서 전국에 배포하였다. 아울러 살인·강도 이외의 죄를 사면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초기 상원사는 효령대군의 원찰(願刹)로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이후의 역사는 잘 알 수 없다. 세종과 세조 등의 호불군주(護佛君主) 이후 억불 정책이 강화되면서 더이상 왕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3) 근현대

절은 조선후기의 여러 지리서에 빠짐없이 이름이 보인다. 근대 들어 1907년 의병운동의 과정에서 전소되었고, 1918년 화송(華松)이 중건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용문산전투가 발발해 모두 소실되었다가 1969년 덕송(德松), 1970년 이후 경한(鏡漢) 등이 꾸준히 중건하였다. 가람은 대웅전과 삼성각, 용화전, 청학당 등으로 구성되었고, 효령대군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가람고(伽藍攷)』
  • 『태고화상어록부록(太古和尙語錄附錄)』
  •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
  • 사찰문화연구원 편집부, 『전통사찰총서 5, 인천·경기도의 전통사찰Ⅱ』, 1995.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이봉춘, 「조선초기 배불사 연구: 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