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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옹원(司饔院) 소속으로 왕실용과 관사용 백자를 전담하여 생산한 관요(官窯).

개설

분원(分院)은 원래 도성 안에 있는 사옹원 본원(本院)에 대비되는 용어로 어선과 궁궐 안에 음식을 바치는 사옹원의 업무를 별도로 나누어 수행한 분사(分司)를 일컫는다. 어선을 담당한 사옹원 본원과 달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모화관에 설치하였다. 1625년(인조 3) 이후에는 왕실용과 관사용 백자를 전담하여 생산한 관요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사옹원이 기본 업무를 수행할 때 사용한 왕실용의 내용(內用) 자기와 관사용의 공용(公用) 자기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위치한 관요에서 제작되었으며 대부분 백자였다. 관요는 사옹원 소속의 사기소(沙器所)로 자기소(磁器所)라고도 하였으며, 17세기 이후에 분원이라고 하였다. 사기소는 전담 관리가 상주하지 않는 번조소(燔造所)의 의미이고, 분원은 사옹원의 관리가 상주하는 분사의 의미로 번원(燔院)이라고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관요는 1467년(세조 13)에 사옹방(司饔房)이 사옹원으로 바뀌고 진상 백자의 제작을 전담한 관리가 배치된 이후에 관영 사기 제작소로서 본격적으로 운영되었다. 관요에서는 음력 2~10월에 백자를 제작하였으며 봄과 가을에 상례(常例)로 약 13,000여 점의 백자를 진상하였다. 이에 맞추어 광주의 사기소에는 한시적으로 종7품 직장(直長) 또는 종8품 봉사(奉事)가 번조관(燔造官)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번조관은 사기장(沙器匠)과 원료와 연료의 운반을 담당한 군인의 관리, 제작이 완료된 백자의 운반과 사옹원 본원에의 수납 등 백자 진상의 전 과정을 통제하였다. 하지만 광주의 사기소에 상주하지는 않았다. 이때의 관요는 관리가 상주하지 않아 사기소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옹원 사기소의 시장(柴場)이 일정한 곳이 없어서 땔나무가 무성한 곳을 따라 옮겨 다녔기 때문이다(『성종실록』 24년 5월 25일).

광주의 사기소를 분원으로 표기한 가장 빠른 기록은 『승정원일기』의 1625년(인조 3) 기록으로 사옹원이 소속 사기장의 확보와 관련하여 본원과 분원을 구분하여 언급하였다. 영조대에는 분원이 이례적으로 번원으로 기록되었다(『영조실록』 17년 6월 4일). 1882년(고종 19)에는 분원 운영상의 문제가 있었으며(『고종실록』 19년 12월 29일), 1884년(고종 21)에 분원 공소(貢所)로 전환되고 사실상 민영화될 때까지 분원으로 불리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 박정민, 「조선 전기 명문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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