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려(駢儷)"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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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4 기준 최신판



글 전체의 어구가 대부분 둘씩 짝이 되도록 구성하는 독특한 한문 문체.

개설

‘변(騈)’은 나란히 수레를 끄는 두 필의 말을 뜻하고, ‘여(儷)’는 두 사람이 나란히 있음을 의미한다. 짝을 맞추어 구성하는 글의 표현 방식이 이와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변려(騈儷)는 중국 한나라 때 발생하여 위진시대 이후 더욱 발전했으며, 남북조에 이르러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형식에 치우친 나머지 내용이 빈약하다는 비판을 받아 당나라 이후에는 쇠퇴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성행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징 및 변천

변려는 ‘변우(騈偶)’ 또는 ‘사륙지문(四六之文)’이라고도 한다. 변우의 ‘변’은 나란히 수레를 끄는 두 필의 말을, ‘우’는 두 사람이 한 조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둘씩 짝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문장의 구가 반드시 두 필의 말이 수레를 끄는 것처럼 둘씩 상대를 이루는데다가, 상대가 되는 구식(句式)이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륙지문은 각 구의 글자 수가 반드시 상응해야 한다는 규정과 관련이 있다. 중국 위진시대에는 변려의 형식이 아직 고정되지 않아서 글자 수에 제한이 없었지만, 이후 제량(齊梁) 때에는 4자구와 6자구로 고정된 사륙지문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4자구를 연이어 쓰거나 6자구를 연이어 썼으며, 4자구와 6자구를 번갈아 사용한 경우도 있다. 『숙종실록』 기사에는, 과거 시험을 사륙지문으로 출제하는 까닭에 선비들이 경전(經傳)보다는 변우에만 힘쓰고 있다는 언급이 보인다(『숙종실록』 34년 6월 14일).

변려의 형식적 특징은 어구 면에서는 대구, 성률 면에서는 평측, 문자의 구성에 있어서는 전고와 수식을 위주로 한다는 점이다. 변려의 대구는 사륙지문의 형식과 관계가 깊다. 4자구나 6자구를 기본으로 하면서, 글자 수의 대구를 맞추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상대 구의 같은 위치에 있는 글자 역시 동일한 문법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배열해야만 한다. 평측에서 ‘평’은 평성을, ‘측’은 상성·거성·입성을 가리킨다. 당나라 이전에는 평측의 제한을 받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는 율시의 영향을 받아 평측이 엄격히 지켜졌다. 전고를 사용하여 문장을 꾸미는 것은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기는 하지만, 변려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다. 심지어는 한 글자만을 가지고도 전고를 활용한 경우가 많다. 또한 대구를 이룬 구절에서는 한 곳에 전고를 사용하면 상대 구절의 동일한 위치에서도 반드시 전고를 사용하였다. 결국 수많은 전고를 사용함에 따라 문장은 점점 난해하게 되었다.

이처럼 변려는 4자 혹은 6자로 이루어진 정제된 구절과 대구를 중시하고, 엄격한 평측의 규정과 전고를 활용하여 문장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유미주의 경향의 대표적인 문학 양식이다. 그에 따라 문자의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긍정적인 성과도 있었으나, 반면 형식에 치우쳐 내용이 부실해지는 결점 또한 드러내게 되었다. 내용이 형식에 매몰되며, 작가가 자신의 모습을 전고나 수식 속에 감추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숙종 때는 이러한 변려문을 숭상하는 데 따른 문제점을 지적한 내용이 보인다(『숙종실록』 20년 윤5월 24일).

사실 변려문은 조선시대의 웬만한 선비들도 매우 어려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장유(張維)는 대제학 자리를 고사하면서 자신은 변려문에 취약하여 관각에서 쓰는 제술도 제대로 하지 못할까 걱정이라고 하였다(『인조실록』 6년 6월 11일).

참고문헌

  • 민병수, 『韓國漢文學槪論』, 태학사, 1996.
  • 왕력 지음, 송용준 옮김, 『중국시율학』, 소명출판, 2005.
  • 진필상 지음, 심경호 옮김, 『한문문체론』, 이회, 1995.
  • 윤호진, 「古文의 範疇 試論; 古文 硏究 序說」, 『중국어문학』16집, 영남중국어문학회, 1989.
  • 왕중, 「백제문학-특히 변문에 대하여-」, 『백제연구』13집,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