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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3 기준 최신판



과거시험에서 보통의 정시보다 많은 인원을 선발하는 정시.

개설

정시의 인원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10명 미만을 선발하였다. 보통의 정시보다 많은 인원을 뽑는 시험을 대정시라 하였다. 정시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운영되다가 1743년(영조 19)부터 초시·전시의 2단계를 두었다. 초시의 인원이 정해져 있었지만 전시의 급제자 수는 그때그때 정하였다.

내용 및 특징

정시는 전정(殿庭)에서 치르는 시험으로 성적 우수자에게 최종 시험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주거나 일정 점수를 가산해 주는 급분(給分)하는 시험이었다. 1542년(중종 37)에 정식 과거로 승격하고 4명을 선발하였다. 정시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제자를 선발하다가 1743년(영조 19)에 처음으로 정시 초시의 법을 정하고 초시와 전시 2단계를 두었다. 정시의 인원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10명 이내가 일반적이었고 많아도 20명을 넘지 않았다. 대정시는 평소의 정시보다 많은 인원을 선발하는 정시를 말하였다.

1743년에 정해진 초시법에 의하면 대정시 문과 초시에서 800명을 뽑되, 모두 서울에 모아 3소(三所)로 나누어 시취하였다. 예조·한성부·성균관에 시소(試所)로 두었고, 가선대부·통정대부 각 1명과 당하관 2명을 시험관[試官]으로 삼았다. 부(賦)와 표(表)로 시험을 치렀는데, 시험지에는 사조(四祖) 대신 아버지의 이름만 쓰도록 하였다. 전시는 전정(殿庭)에서 실시하고, 시관은 승정원에서 추천하였다. 시험지에는 사조(四祖)를 모두 썼다. 답안에서 인적 사항을 적은 피봉 부분과 답안 부분을 분리하는 할봉(割封), 역서 후 본래 답안을 확인하는 사동(査同), 역서 후 답안지 사본을 확인하는 지동(枝同), 답안을 옮겨 적는 역서(易書)는 모두 동당시(東堂試)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영조실록』 19년 1월 25일).

정시 전시의 인원은 1743년 정시의 경우 26명을 뽑았다. 영조대에 20명 이상을 선발한 경우가 많았고, 가장 많은 인원을 선발한 것은 1794년(정조 18)의 50명이었다.

변천

정시는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거나 급분하는 시험으로 운영되다가 1542년(중종 37)에 정식 과거로 승격하여 실시되었다. 한 번의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여 응시자가 너무 많이 몰리고 공정한 운영이 어려워지자 1743년(영조 19)부터는 초시와 전시를 구분하여 실시하였다. 1844년(헌종 10)부터는 초시를 각 도 감영에서도 시행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