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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1 기준 최신판



중국에서 간행한 책을 한국이나 일본에서 총칭할 때 사용한 말.

개설

당본(唐本)과 상대되는 용어로 조선본은 향본(鄕本), 상판(常板)이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고서는 간행된 국가에 따라 한국본, 중국본, 일본본 등으로 구분한다. 한국본은 동본(東本), 중국본은 당본·당판본(唐板本)·화본(華本)·지나판(支那板), 일본본은 화각본(和刻本)이라고 한다. 이를 시기에 따라 한국본은 고려본·조선본·개화기간본으로, 중국본은 송판본(宋板本)·원판본(元板本)·명판본(明板本)·청판본(淸板本)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문헌상에서 당본이라는 용어는 시기에 상관없이 중국에서 간행한 서적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1484년(성종 15)에 당본 『구양수집(歐陽脩集)』을 금속활자인 갑진자(甲辰字)의 글자본으로 삼았고(『성종실록』 15년 8월 21일), 1515년(중종 10)에도 당본 『자치통감』을 금속활자인 병자자(丙子字)의 글자본으로 선정하였는데(『중종실록』 10년 11월 4일), 이 당시 사용한 판본은 명 대에 간행한 명판본(明板本)이었지만, 명본(明本)이 아닌 당본으로 통칭하였다. 또한 1714년(숙종 40)에 관상감에서 관상감(觀象監) 정(正)허원(許遠)이 연경(燕京)에서 구입해 온 당본을 모본으로 하여 『의상지(儀象志)』를 간행할 때(『숙종보궐정오실록』 40년 5월 23일) 사용한 당본은 청대에 남회인(南懷仁)이 저술한 청판본이었다.

당본 또는 당판과 구별하여 한국의 서책을 뜻하는 용어로는 향본, 상판이 사용되었다. 예컨대 금역당(琴易堂)배용길(裵龍吉)이 『가례(家禮)』를 고이(考異)할 적에 ‘소렴(小殮)에는 의금(衣衾)으로 수습한다.’의 주해인 ‘속련긴급(束練緊急)’의 경우 연(練) 자가 당본에는 염(殮) 자를, 향본에는 박(縛) 자를 사용했다고 하여 중국본을 당본으로, 조선본을 향본으로 지칭하였다. 또한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수록된 이문원(摛文院) 소장목록에는 “동이루(東二樓)에는 어제와 어필 193질, 선첩과 선보 52질, 어정 제서 87질, 당판(唐板)인 경부 15종, 사부 44종, 자부 35종, 집부 57종, 상판인 경부 41종, 사부 114종, 자부 66종, 집부 152종을 보관하였다.”라고 하여 당판은 중국본을, 상판은 조선본을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경에 작성된 『운각책도록(芸閣冊都錄)』의 경우에는 교서관에 소장된 책판의 소장량과 보존 상태를 ‘전강경서질(殿講經書秩)·과장질(科場秩)·당판질(唐板秩)·경서낙질(經書落秩)·책판도록(冊板都錄)’으로 구분하여 중국본을 당판질에 포함하였고, 이왕직도서관이 1910년 3월부터 1915년 2월까지 구입한 중국본을 기록한 『당판재산목록(唐板財産目錄)』에서도 시기를 구분하지 않고 중국본을 당판으로 통칭하였다.

정조대에는 중국의 문헌을 대대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내각방서록(內閣方書錄)』을 작성하거나, 구홍문관(舊弘文館)과 강화부(江華府) 행궁(行宮)에 소장되어 있던 명 황실에서 보내온 서적들을 규장각에 보관하는 한편 늘어난 중국본을 보관하기 위해 별도의 장서처를 마련하였다. 예컨대 규장각의 서남쪽에 상하 2층으로 된 열고관(閱古觀)을 건립한 후에도 중국 서적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열고관의 북쪽으로 꺾어 개유와(皆有窩)를 만들고서[『정조실록』 즉위 9월 25일 2번째기사], 1777년(정조 1)에 북경의 서점에서 구입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의 서적을 보관하였다.

고종대에는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集玉齋)에 청대의 내부간본(內府刊本) 및 기타 청판본을 비롯하여 방대한 양의 중국본 서적이 수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1894~1895년에 편찬된 집옥재 수장 도서를 포쇄할 때 작성했던 목록인 『집옥재서적목록(集玉齋書籍目錄)』을 통해 그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금역당집(琴易堂集)』
  • 『당판재산목록(唐板財産目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천혜봉, 『한국서지학』, 민음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