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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20 기준 최신판



고려 및 조선시대 관원들의 출근 및 근무 상황을 기록한 장부.

개설

고려 및 조선시대에는 공좌부(公座簿)를 근거로 하여 관원들의 근태를 점검하고, 매년 2차례 있는 근무 평정 및 인사 발령을 시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공사에서 공좌부를 기준으로 관리의 근태를 평가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관직에는 대개 일정한 임기가 있어 이 임기가 차면 전근 혹은 승진이 되었는데, 임기가 차는 것을 ‘사만(仕滿)’ 또는 ‘개만(個滿)’이라고 하였다. ‘사(仕)’는 출근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출근일제, 즉 사기제(仕期制)를 운용한 것은 첫째로 특정 관직에 오래 재임하면 여러 폐해가 생기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일정 기간 한 관직에 근무하여 그 사무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6품 이상은 출근일 900일 곧 30삭, 7품 이하는 450일 곧 15삭, 명예직으로 있던 무록관은 360일 곧 12개월을 기준으로 하여 전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하나의 원칙에 불과하였고 차차 법이 느슨해져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근무 일수 계산도 실제 근무 일수가 아닌 임관 후의 일수를 형식적으로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지켜지지 않아 때로는 전랑과 언관이 다달이 승진 또는 전근된 일이 있었고, 혹은 과거에 급제하여 5년도 채 못 되어 당상관이 되거나 10년이 못 되어 재상이 된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전직이나 승진의 제도가 일정한 실적을 원칙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에서는 당상관 이상은 불문하고 중앙의 당하관 이하는 6주년, 지방의 수령급은 9주년, 관찰사 소속은 6주년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다만 지방관의 임기는 비교적 엄격하게 지켜졌는데, 특히 과만(瓜滿), 과기(瓜期) 또는 과한(瓜限)이라 하여 관찰사·도사는 재임 기간을 360일, 수령은 5년, 당상관과 가족을 동반하지 아니한 수령 및 훈도 등은 2년 반이었으나 농번기에는 이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관직인 절도사·우후·평사는 2년, 가족을 동반하지 아니한 첨사·만호는 2년 반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뒤에 수차의 변경을 거쳐 유수·관찰사는 2년, 도사는 1년, 수령은 30개월 또는 60개월이 차면 각기 이동하게 되었다.

위와 같은 임기의 출근 수를 산출하는 근거가 바로 공좌부인데, 즉 사일(仕日)을 합산하여 그 일수를 계산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관리의 근무 시간을 보면 묘시(卯時) 즉, 오전 6시에 출근하여 유시(酉時) 즉, 오후 6~7시에 퇴근하도록 되어있었다. 단 해가 짧을 때는 진시(辰時) 즉, 오전 8~9시에 출근하여 신시(申時) 즉, 오후 4~5시에 퇴근하였다. 공좌부의 실물은 현전하는 것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나 ‘사일단자(仕日單子)’라고 하여 공좌부상의 출근 일수를 모두 합산하여 6월과 12월의 근무 평정, 즉 도목정사(都目政事) 시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이 몇몇 전해지는데, 군시기의 사일단자가 현전하고 있다.

변천

공좌부는 『조선왕조실록』상에서 광해군 때의 기록이 가장 마지막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일례로 1595년(선조 28)에 군자감 직장심종직(沈宗直)이 출근기록부인 공좌부에 기록된 결근 표시를 지워 파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8년 12월 23일).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공좌부상의 기록은 개국 당시의 실질적인 기재와 운용 경향이 점점 형식화되면서 사회 문제시되는 측면이 있으며, 이 때문에 공좌부의 기재 목적이었던 근무 기강 확립과 관리들의 부패 척결 등이 점점 난항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매년 2차례 실시하는 근무 평정을 통한 인사이동에서도 출근 일수의 계산은 점차 부수적인 인사 기준이 되었고, 특별히 공과가 있거나 확연하게 드러나는 근태 상황을 가지고 인사행정을 운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지방관에 있어서는 ‘포폄단자(褒貶單子)’상의 근무 실태에 대한 관찰사의 평가에 의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의의

예나 지금이나 공직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인사 고과의 기준은 출결 상황에 대한 평가이고 그다음이 담당 업무에 대한 공과를 따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면에서 공좌부라는 출근 기록부가 조선전기에 활발하게 작성되고 인사 관련 행정에서 기초적 판단 근거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또 그 작성에서의 부패 및 폐단이 탐관오리의 척결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조선왕조실록』상의 기록들은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운태, 『조선왕조행정사』, 박영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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