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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19 기준 최신판



일본의 천황을 보좌하여 정무를 집행하는 관직.

개설

헤이안[平安] 시대인 9세기 중엽 외척인 후지와라씨[藤原氏]가 권력을 강화하면서 천황이 어린 경우에는 섭정(攝政)으로, 성인이 되면 관백(關白)으로서 조정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섭정과 관백은 후지와라씨와 함께 주요한 다섯 가문에서 돌아가며 차지하였다. 에도[江戶] 시대 이후에는 관백을 바쿠후[幕府]의 추천을 받도록 하여 무가(武家)의 통제하에 들어갔지만 이후에도 실제 일본 근세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68년 초 막부가 무너지고 천황이 정권을 장악하는 이른바 왕정복고(王政復古)에 따라 섭정과 관백,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등의 직책이 없어지면서 관백의 관직은 사라졌다.

내용 및 특징

헤이안 시대인 9세기 중반 외척이었던 후지와라씨의 권력이 강화되었는데, 후지와라씨는 나이 어린 천황이 즉위하면 섭정이 되어 정무를 돌보았고, 천황이 성인이 되면 관백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884년 광효천황(光孝天皇)이 태정대신(太政大臣)인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에게 내려주었던 칙령에 관백에 해당되는 직무가 보이지만 관백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887년 천황의 모토쓰네에 대한 조서에 처음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정치 상황에 따라 두어졌던 섭정과 관백이 967년 레이제이[冷泉]천황 때부터 상설화되어 후지와라씨가 맡게 되었다. 일본사에서는 이를 섭관정치(攝關政治)의 시대라고 부른다.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에 걸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는 4대째 천황의 외조부가 되어 50년 동안 섭정과 관백을 독점하기도 하였다. 이후 섭정과 관백은 후지와라씨와 함께 고노에[近衛], 구조[九條], 다카쓰카사[鷹司], 니조[二條], 이치조[一條]의 다섯 집안이 오섭가(五攝家)라 불리며 관백과 섭정을 돌아가며 차지하였다. 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만이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의 양자가 되어 1558년 관백에 취임하여 일본 최초의 무가(武家) 관백이 되고 이후 그의 조카 히데쓰구[秀次]가 관백의 직책을 물려받은 것만이 예외였다. 섭관정치의 중심은 원래 섭관 집안의 업무를 처리하는 만도코로[政所]였다. 따라서 천황의 공식적인 조정은 단순히 의식(儀式)을 행하는 장소에 불과하게 되고 조정의 관료는 의식이나 전례를 연구하거나 풍류를 즐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변천

17세기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관백 직은 바쿠후의 추천을 받는 것을 변하게 된다. 1615년 천황 및 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에 의해 바쿠후의 추천을 받게 함으로써 천황의 제1의 신하였던 관백직도 실질적으로 바쿠후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다만 조정의 회의는 관백의 주재로 열리고 관리 임명 등의 주요한 사항은 관백이 조정의 결정을 바쿠후와 상의하도록 절차를 마련함에 따라 조정 내에서의 관백의 지위는 확고히 정해졌다. 아울러 관백 중에는 자신의 딸을 쇼군의 정실로 들여보낸 경우도 있어 바쿠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도 있었다. 1868년 막부가 무너지고 천황이 정권을 장악하는 이른바 왕정복고에 따라 섭정, 관백, 정이대장군의 직책이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민두기, 『일본의 역사』, 지식산업사, 1976.
  • 아사오 나루히로 외(이계황 외 역), 『새로 쓴 일본사』, 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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