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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5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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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용안현 |
한글표제 | 용안현 |
한자표제 | 龍安縣 |
상위어 | 전라도(全羅道) |
동의어 | 칠성(七城), 도내산(道乃山) |
관련어 | 백안부개(伯顔夫介)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정성일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용안현(龍安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6년 10월 10일, 『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세종실록』 17년 7월 22일,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일대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321년(고려 충숙왕 8)에 고장 사람인 백안부개(伯顔夫介)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고려에 공을 세웠다고 해서 용안현으로 승격되었다.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전주의 속현이었던 풍저(豊儲)를 용안현에 소속시켰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용안현과 함열현을 합쳐서 안열현으로 하고 감무를 두었다가, 1417년(태종 17)에 다시 분리하였다. 1455년(세조 1)에는 용안현이 옥구진의 좌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용안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전주진(全州鎭)에 속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용안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용안현이 고려 때 함열현의 도내산(道乃山) 은소(銀所)로 되어 있다. 1321년에 이 고을 출신인 백안부개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고려에 공을 세웠다 하여 용안현으로 승격시켰다. 1391년에 전주의 속현이었던 풍저를 용안현 소속으로 옮겼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용안현과 함열현을 합치고 안열감무(安悅監務)로 하였다. 1416년(태종 16)에 용안현감을 두었으며(『태종실록』 16년 10월 10일), 1417년에 다시 원래대로 분리하였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안현에 종6품 현감(縣監)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용안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변천
1435년(세종 17)에 다시 용안현과 함열현의 합병 문제가 논의되었다. 전라도감사민심언(閔審言)은 용안과 함열이 땅도 좁고 백성도 적으며 이웃 고을과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서, 용안을 폐지하여 함열에 합칠 것을 건의하였다(『세종실록』 17년 7월 22일).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용안과 함열을 전라도 옥구진(沃溝鎭)의 좌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용안현이 전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여산에 전라후영(全羅後營)이 설치되었다. 후영(後營)의 속읍은 여산·익산·고산·금산·진산·용안·함열·임피·옥구·용담 10곳이며, 후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4초(哨), 속오(束伍) 34초, 표하군(標下軍) 317명, 당보군(塘報軍) 117명, 수솔군(隨率軍) 629명으로 되어 있다.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용안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용안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1914년에는 그것이 익산군으로 통폐합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칙령(勅令)』
- 『관보(官報)』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익산시사』, 익산시사편찬위원회, 2001.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