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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래 존재한 불교 신앙 결사 조직, 또는 조선시대 공동체적 촌락 생활 문화를 위한 계 조직.

개설

향도(香徒)는 삼국시대 불교 신앙 결사체(結社体)가 그 시원이나 고려시대에 들어와 다양한 성격으로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불교 신앙 결사가 퇴조하면서 촌락의 생활 문화 공동체 조직, 즉 향촌결계(鄕村結契)의 형태인 향도계(香徒契), 상두계(喪頭契)·상여계(喪輿契) 등으로 변화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불교 신앙 결사로서 기록상 확인되는 최초의 향도 조직은 609년(신라 진평왕 31)경 김유신(金庾信)을 중심으로 조직된 화랑도(花郞徒)로 그 명칭이 바로 ‘용화향도(龍華香徒)’였다. 향도 조직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불상·종·석탑·사찰 등의 조성에 대규모 노동력과 경제력 등을 제공하기 위해 조직된 불교 신앙 결사체였다. 향도는 승려와 일반 신도들로 조직되었는데, 2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향도가 있는가 하면 3,0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향도도 있었다.

향도의 활동 내용은 고려전기까지 불상·석탑·사찰의 조성 등 대규모 불사(佛事)에 치중하였던 데 비하여, 고려후기에는 재회(齋會)·소향(燒香)·매향(埋香)·염불·상호 부조 행위 등과 같이 소규모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422년(세종 4)에는 고려시대 향도에 대한 기록이 적힌 비(碑)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비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1002년(요 통화 20, 고려 목종 5)에 향도 3백여 명이 매향했다고 하였다(『세종실록』 4년 2월 29일).

향도 조직과 성격도 고려후기인 12세기 이후 사회 변동과 함께 매우 다양하게 변하여 중앙의 고관들로 이루어진 향도, 여성들만의 향도, 친목적인 향도계 등이 있었다. 고려말기 『고려사』「열전」 35권의 심우경(沈于慶)에 관한 기사에 나타난 향도연(香徒宴) 기록을 보면 향도 구성원들이 계를 맺고 향을 피우며, 번갈아 가면서 잔치를 열고 술을 마시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구성원 간의 친목을 다지고 위계질서를 다잡기도 하였다.

향도의 두 번째 유형으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 신앙적 요소가 퇴색한 촌락 공동체 조직으로 향촌 백성들이 조직한 향도계가 있다. 조선초기 촌락민들이 만든 향도 조직은 적게는 7~9명, 많게는 100여 명으로 구성되었고, 활동 내용도 불교 신앙 활동보다 향촌 공동체적인 모습이 강하였다. 동린계(洞隣契)로 모여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거나, 장례 시의 부조 행위 등 공동체적 생활에 관련되었다. 이 경우 향도 외에 향도계, 상두계로도 불렸다.

조직 및 역할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보이는 향도 기사는 1393년(태조 2) 11월의 기록으로, 도평의사사에서는 당시 가뭄으로 흉년이 예상되는데도 백성들이 나중 일을 돌보지 않고 신(神)에게 제사하고 향도계 등의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하였다(『태조실록』 2년 11월 28일). 이는 이 시기에 향도가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향도의 기능과 활동이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1398년의 “외방의 백성들이 그 부모의 장삿날에 이웃의 향도를 모아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불면서 애통해하지 않으니, 예속(禮俗)에 누를 끼친다.” 하는 도당의 건의에서였다(『태조실록』 7년 12월 29일).

이러한 기사는 세종조에도 계속하여 보이며(『세종실록』 11년 4월 4일), 1449년(세종 31)의 사간원 상소에서는 “지금 지방 양반의 부녀가 혹은 향도를 칭탁하고 혹은 신사(神祀)를 칭탁하여, 각각 술과 고기를 가지고 공공연히 모여서 마음대로 오락을 방자히 하여 풍속 교화를 더럽히고 있다.” 하고 지적하였다(『세종실록』 31년 1월 22일).

한편 조선초기에는 국가 권력이 공적으로 향도를 단위로 역(役)을 징발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세종 때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시정 상인, 각 관사의 노비 등뿐만 아니라 향도에게도 의대(衣帶)·병풍·족자(簇子)·단필(段匹)·금은(金銀)·주옥(珠玉)·잡식(雜飾)을 분정(分定)하여 바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8년 4월 12일). 명종 때는 한성부에서 도로 정비를 하면서 향도를 부역에 동원하자는 논의가 있었다(『명종실록』 18년 9월 12일).

이처럼 향도는 고려말의 제도를 이어 조선초기에는 자연 촌락을 기반으로 조직되어 회음의식(會飮儀式), 장례 시의 부조 활동 등을 하였다. 16세기 이후에는 집약 농업 기술이 발달하고 마을 단위의 생활 공동체 문화가 형성되면서 향도에 촌락 공동체적 성격이 더해졌다. 이후 사족 중심의 지배 질서가 확립되면서 조선전기 공동체적 기반을 가졌던 대부분의 촌락 조직들은 지주제적 강제와 향약 질서의 강요로 사족들의 통제 하에 귀속되었다. 향약의 실시 논의와 함께 그 하부 단위로의 활용이 거론되는 향도, 음사(淫祀), 동린계 등의 기층 촌락민 조직들은 사족계(士族契)나 향약 조직의 하부 구조로 대부분 편입되어 부분적 기능을 담당하였다(『선조실록』 6년 8월 17일).

변천

향도와 같은 촌락 조직이 사족 중심의 향약 조직과 결합하면서 사족의 향약은 상계(上契), 촌락 조직은 하계(下契)로 불렸다. 그런가 하면 이앙법의 보급과 함께 집약 농법이 발달하게 되자 공동 노동 조직인 ‘두레’가 발생하면서 전통적인 향도의 역할은 크게 위축되고 상장례를 담당하는 상두꾼으로 지칭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전기 향도 조직의 동린계, 그리고 음사(淫祀)적인 전통을 계승하면서 기층민의 조직으로 남아 있던 촌계(村契)류 조직들은 촌락 사회와 농민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자료에서는 이와 다르게 도성이나 읍성 주위에서, 그리고 대부분 자신의 생활 근거지를 잃은 하천민 상태의 집단들로 구성된 향도계류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논한민(論閑民)」조에서 “우리나라의 소위 향도계는 서울은 물론이고 시골의 어느 곳에나 있다. 무릇 축성 등 관가의 여러 일에 불려 다니기도 하고 여항(閭巷)의 길흉 대소사 예컨대 상여 메는 일, 분묘 조성하는 일, 제언 쌓고 농토 일구는 일, 수레 끄는 일, 집 짓기, 측간 청소, 우물 파는 일, 가마 메는 일, 이엉 마는 일, 담 고치는 일, 모내는 일, 북 치는 일, 기와나 벽돌 굽는 일, 눈 치우는 일, 물장사 등등 잡다한 일들이 모두 이들로부터 나온다.”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걸인배이기 때문에 하루에 할 일을 수일 걸려서 마치며, 또 당시 향도계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이들이 도둑으로 무리 지어 다니기 때문인 듯 보인다고까지 말하였다.

이는 향도가 비단 ‘상두꾼’이라거나 촌락 공동체 내부의 생활문화적인 면에서 동린계적인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던 계열만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숙종대에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도하(都下)의 무뢰배들이 검계(劍契)를 만들어 사사로이 서로 진법을 익히니 마땅히 금지하는 법을 먼저 세워 향도계를 모두 혁파하고 그 도가(都家)를 허물어 폐단의 근원을 끊어버려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숙종실록』 10년 2월 12일)(『숙종실록』 10년 2월 25일)(『숙종실록』 10년 3월 22일).

도성의 이들 유민(遊民)류의 조직들은 후대에는 검계·살주계(殺主契)와 같은 사회 변혁 세력으로 조직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이태진, 「17·8세기 향도 조직의 분화와 두레 발생」, 『진단학보』 67, 1989.
  • 이해준, 「조선후기 동계·동약과 촌락공동체조직의 성격」, 『조선후기 향약연구』 민음사, 1990.
  • 이해준, 「조선시대 향도와 촌계류 촌락 조직」, 『역사민속학』 1, 1991.
  • 채웅석, 「고려시대 향도의 사회적 성격과 변화」, 『국사관논총』 2,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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