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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 폐지된 조선후기 병영·순영·진영 등을 대신하여 1896년부터 1900년(광무 4)까지 존재하다가 1900년 진위대에 통합된 지방군.

개설

1895년(고종 32) 7월 조선후기 지방군이 폐지된 후 평양·전주의 훈련대가 지방군 역할을 담당했으나, 서울의 훈련대가 왕비 시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9월 13일 훈련대 전체가 폐지되었다. 대신 훈련대를 계승한 진위대가 평양부와 전주부에 1개 대대씩 창설되었다. 하지만 훈련대와 마찬가지로 진위대는 설치 지역과 군인 수가 너무 적어, 국방과 치안의 임무를 적절히 수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1896년(건양 1) 5월 통영·북청·대구·강화·청주·공주·해주·춘천·강계에 지방대가 설치되었다. 이후 몇 차례 변화하다가 1899년(광무 3) 1월 지방대 편제 개정에 따라 전라북도와 평안북도를 제외한 11도의 14곳에 정원 413인을 둔 지방대가 설치되었다.

지방대 군인은 장교인 ‘대대장, 대대장 부관, 향관(餉官), 중대장, 소대장’, 하사인 ‘정교, 부교, 참교’, 그리고 병졸, 곡호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대대장의 월급은 77원 15전으로, 대략 쌀 6~8섬에 해당되었으나, 하사와 병졸은 대부분 쌀 1섬의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9원 이하의 월급을 받았다.

지방대 경비 중에서 ‘장교·사졸의 월급, 식품비, 피복비’가 전체 경비의 약 94.75%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으며, 주요 재원은 지방대 부근의 군이 납부하는 공전(公錢)이었다. 지방대는 대규모 도적, 동학교도, 의병을 체포하는 등 지방 진무(鎭撫)와 국경을 침범한 청국의 떼강도인 비류(匪類)를 격퇴하는 등, 변경 수비를 담당하였다.

1900년 7월 진위대로 통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 군대가 모두 폐지된 상황에서 중앙군과 지방군 역할을 담당했던 훈련대마저 왕비 시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1895년 9월 13일 폐지되면서, 「육군편제강령」에 따라 왕성 수비를 전담하는 중앙 친위대 2개 대대와 지방 진무나 변경 수비를 담당하는 진위대가 평양부와 전주부에 1개 대대씩 창설되었다. 하지만 지방군인 진위대는 설치 지역이 너무 적고, 군병이 888명에 불과하여 국방이나 치안의 임무를 적절히 수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1896년 5월 친위대와 진위대의 편제를 본떠 ‘통영·북청·대구·강화·청주·공주·해주·춘천·강계’에 지방대를 설치하고, 해산된 구식 군졸 등을 9개 지방대에 편성시킴으로써 2,300명의 병졸과 87명의 장교·하사관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지방군은 평양과 전주의 진위대 888명을 포함 3,275명으로 증가하였다. 지방대의 명칭은 주둔지의 이름에 따라 결정되었고(『고종실록』 33년 5월 30일), 진위대가 있는 도에는 지방대를 설치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몇 차례 지방대 설치 지역이나 군인 수가 달라졌다. 1898년 12월, 지방대의 편제를 개정하여 지방 진무와 변경 수비를 전담하게 하자는 건의가 올라왔고 이듬해 1월 채택(『고종실록』 36년 1월 15일)됨으로써, 전라북도와 평안북도를 제외한 11도의 14곳에 군인 수가 413인으로 통일된 지방대가 각각 설치되었다. 지방대는 1900년 7월 진위대로 통합되기까지 존속하였다.

조직 및 역할

1899년 지방대의 조직을 ‘관등(官等), 직명(職名), 군인 수, 1인당 월급’을 통해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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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장교로서 ‘대대장 1인, 대대장 부관 1인, 향관 1인, 중대장 2인, 부위 4인, 소대장 4인’, 하사(下士)로서 ‘정교 2인, 부교 11인, 참교 18인’, 병졸 360인, 곡호대 9인으로 구성되었다. 아울러 곡호대 9인이 처음으로 배치되고, 1899년 지방대부터는 군인을 모두 ‘인(人)’이라고 호칭한 데에서 군인의 수를 셀 때 인이나 명(名) 등으로 구분하였던 종전의 차별성이 사라진 점 등이 주목된다.

군인의 월급을 살펴보면, 대대장 참령의 월급은 77원 15전인데, 1900년 진위대 때에는 20전이 인상되었다. 1900년 경기와 충청도의 1석당 미가(米價)가 8.75~12.5원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대대장은 쌀 6~8석에 해당되는 월급을 받았다. ‘부위의 월급 34원, 중대장 정위의 월급 46원 75전, 소대장 참위와 3등 군사의 월급 28원 5전’은 1900년 진위대 때와 같았다. 2등 군사의 월급은 28원 5전이었는데 1900년 진위대 때에 34원으로 인상되었고, 1등 군사는 진위대 때 46원 75전의 월급을 받았다. 하사인 정교는 1896년 지방대 때에 비해 2원 오른 9원, 부교는 1원 50전 오른 7원 50전, 참교는 1원 50전 오른 6원 50전을 월급으로 받았는데, 1900년 진위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병졸의 월급은 3원으로 1896년 지방대 때부터 1900년 진위대 때까지 전혀 인상되지 않았으며, 체전부(遞傳夫) 즉 우체부와 월급이 같았다. 따라서 하사관들과 병졸들은 대부분 쌀 1석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았다는 점에서 생활이 곤궁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99년 지방대 시절 경비를 살펴보면, 1년 경비로는 ‘월급, 피복비, 식품비, 온돌시비, 소모비, 보속비, 마사료, 마장비, 연습비, 여비, 치료비, 이장비’ 등으로 45,285원 40전이 책정되었다. 그중에서 ‘장교·사졸의 월급 21,792원 60전은 약 48.12%, 식품비 13,708원 80전은 약 30.27%, 피복비 7,410원은 약 16.36%’로, 전체 경비의 약 94.75%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00년 진위대 때에도 월급·식품비·피복비가 전체 경비의 약 90.87%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유사하였다. 아울러 ‘매장비 60원, 말의 사료 및 장비 334원, 대대 건물 수리비 600원’이 책정되었고, 치료비와 같은 금액인 연습비 120원은 전체 경비의 약 0.27%라는 점에서 군사력을 강화시키기에는 너무 적었다.

지방대 경비의 핵심 재원은 지방대 부근의 군이 납부하는 공전이었다. 공전은 결전(結錢)이나 호전(戶錢)이며, 각 군은 공전으로 지방대 경비를 지불한 뒤 상납할 공전에서 그 액수만큼 제하였다. 한 예로 청주지방대가 주둔한 청주군은 1898년 청주지방대 경비로 6월부터 12월까지 10,626원 85전 4리와 1년 피복비로 995원 87전 5리를 지급하였다.

지방대의 역할은 지방의 진무와 변경의 수비를 전담하는 것이었다. 먼저 지방의 진무와 관련하여 지방대는 경찰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가 큰 도적이나 동학교도 등을 체포하였다. 청주지방대는 1896년 7월 보은군에 침입한 도적을 격퇴시켰고, 1900년 3월에는 대구에서 속리사(俗離寺)로 기도하러 온 거동 수상자 11명 및 서울로 올라가 명성황후와 동학 최선생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일본인도 축출하려 한 9명을 속리사 부근에서 체포하였다. 아울러 강화지방대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철원에 일부 병력을 주둔시켰다가 1900년 철수시켰다. 또한 지방대는 변경을 수비하였는데, 북청지방대와 삼수주대(三水駐隊)는 1899년 9월 함경남도 삼수와 갑산에 출몰한 청나라 비적을 격퇴시키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1898년 양양군 역리 김내홍이 원주지방대 하사로 행세하면서 해리전(海利錢) 480냥을 고성군민에게 약탈하였고, 1900년 원주지방대 전 부위함두병이 각 군에 다니면서 유민을 속여 재산을 빼앗는 등 지방대와 관련된 범죄도 있었다.

변천

지방대의 변천에 대해 설치 지역과 군인 수의 변화를 살펴보면 <표 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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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5월 지방대가 창설되었을 때, ‘경기도 강화, 충청도 청주·공주, 전라도 광주, 경상도 대구·통영, 평안도 강계, 강원도 춘천, 함경도 북청’ 등 9곳에 2,387명이 배치되었다. 통영과 북청이 415명으로 군인의 수가 가장 많았고, 강계가 103명으로 가장 적었는데, 통영의 지방대는 1896년 6월 8일 고성으로 옮겨졌다. 이어 1896년 8월 충주·홍주·상주·원주군에 각각 159명의 지방군이 배치되어(『고종실록』 33년 8월 26일) 군인 수가 3,023명으로 증가하였으나, 9월에 공주·충주·홍주·상주·춘천·원주·강계 등 7개 지방대가 폐지되어 1,868명으로 감소하였다. 재정상의 어려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온 후 지방군을 강화하기 위해 1897년 6월 수원·원주·공주·안동·광주·황주·안주·종성 등 8개 지방대에 각각 639명을 설치하면서, 지방대 설치 지역은 14곳으로 늘고, 군인 수도 6,980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 후 1899년 1월 지방대 편제 개정으로 인해 곡호대 9인을 포함 군인의 수가 413인으로 통일되었다. 하지만 전체 군인 수 5,782인은 1897년 6월에 비해 1,198인이 감소하였고, 조선후기나 1900년 진위대 때보다도 매우 적었다. 하지만 지방대 군인은 월급을 받으면서 항상 훈련하고 복무하는 직업 군인이라는 점에서, 1년에 몇 개월씩 복무하는 조선후기 지방군에 비해 질적인 면에서 우수하였다.

한편 1899년(광무 3) 6월 원수부(元帥府) 창설에 따라 지방대는 군부 대신 원수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1900년 7월 지방군 명칭을 진위대로 통일하고 진위대를 연대로 편성하자는 건의가 받아들여져 지방대는 진위대에 통합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관보(官報)』
  • 『여지도서(輿地圖書)』
  • 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혜안, 2000.
  • 김기성, 「대한제국기 진위대 증설과 군부예산 운영」,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 서태원, 「갑오개혁 이후 충청북도 지방군-청주지방대와 진위대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136, 2007.
  • 서태원, 「대한제국기 원주진위대 연구」, 『호서사학』3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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