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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9 기준 최신판



조선후기 경상도의 공물과 잡역 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1결당 쌀 12두를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던 세법.

개설

조선왕조는 국가 재정을 운영하기 위하여 백성들로부터 전세(田稅)·공물(貢物)·진상(進上)·잡역(雜役)·군역(軍役) 등을 수취하는 부세(賦稅)제도를 운영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공물(貢物)은 왕실과 중앙 각사의 운영을 위한 식재료·생활용품·사무용품 등의 각종 물품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공물은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토산물을 분정(分定)하는 이른바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원칙에 따라 징수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지역별 공물 분정이 고르지 않은 문제가 심화되고, 공물에 대한 값을 쌀로 주고 대신 납부하게 하는 방납(防納)이 성행하였다. 그런데 방납 행위가 백성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주면서 조정에서는 공납제(貢納制) 전반의 개혁을 모색하였다. 조정에서는 현물로 납부하던 공물을 모두 쌀로 납부하게 하고, 서울에서 공인(貢人)들을 통하여 필요한 공물을 조달하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1678년(숙종 4) 도승지(都承旨)이원정(李元禎)의 건의를 계기로 영남 지방에서도 대동법이 전격 시행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의 부세 중 공물은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공물은 군현 단위로 책정하여 운영되었지만, 그 최종적 부담은 민호에서 담당하였다. 그러나 현물로 상납되는 공물 수취 체제는 생산되지 않는 불산공물(不産貢物)의 분정, 상납 과정에서 발생하는 방납과 납부 공물의 품질 불량을 들어 퇴짜 놓은 점퇴(點退) 등으로 인하여 점차 위기에 봉착하였다. 17세기 전반 사대동(私大同)이 확산되는 가운데 조정은 임진왜란 이후 발생한 공물 불균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604년(선조 37) 갑진공안(甲辰貢案)을 상정하여 17세기 공안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는 경기에 선혜법을 실시하였으며, 1623년(인조 즉위년)에는 강원·충청·전라도에 삼도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비록 삼도대동법은 1626년(인조 3) 강원도를 제외하고 혁파되었지만 이후 충청·전라도 지역에 재실시되는 데 기반이 되었다. 경기와 강원도에 실시되었던 대동법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일부 관료들은 점차 대동법을 확대해 실시하자고 요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17세기 중엽 충청·전라도 지역에 대동법이 다시 시행되었다. 충청도의 대동법은 1651년(효종 2), 전라도 연읍 지역의 대동법은 1658년(효종 9), 전라도 산군 지역의 대동법은 1662년(현종 3)에 각각 실시되었다. 그러나 경상도는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인 특성과 갑진공안에 따른 도별 공물 불균, 계묘양전에 따른 경상좌우도의 전결 불균, 조운제도의 미설치 등의 이유로 대동법 시행이 지연되었다.

경상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의견이 대두된 것은 전라도 산군 지역의 대동법이 논의되던 1661년(현종 2)이었다. 당시 전 군산포만호도신징(都愼徵)은 경상좌병영의 이전과 수군역의 변통 문제 등을 주장한 15조의 상소에서 영남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상소에 대해 비변사는 충청·전라도와 같이 일체로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조하였으나, 경상도는 그와 상황이 다르고 계속된 흉년으로 시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와 같은 비변사의 의견이 수용되면서 경상도 대동법은 연기되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영남대동법 시행 논의는 1677년(숙종 3)에 들어서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였다. 당시 논의를 주도한 인물은 이원정(李元禎)이었다. 그는 여러 궁가의 어전·염분의 혁파와 환곡 문제 등 6가지 변통책을 제시하는 가운데 경상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해 8월 민정에 대한 경상감사의 장계가 도착하자 영남대동법의 실시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대사간이원정은 도내의 1~2고을이 대동법을 반대한다고 하나 그것은 수령들이 막은 결과이고 민정은 사실상 대동법을 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난번 흉년으로 대동법이 시행되지 못한 것에 대해 지역민의 원성이 높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흉년이라도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의견에 지평손만웅(孫萬雄), 호조 판서오시수(吳始壽), 좌의정권대운(權大運)의 의견이 분분하자, 숙종은 금년부터의 시행은 어렵지만 경상도 지역민의 정서에 따라 내년부터는 경상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로써 이듬해인 1678년(숙종 4)부터 영남대동법이 실시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남대동법의 실시가 확정되자 조정에서는 바로 실무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1677년(숙종 3) 선혜청 예하에 영남청(嶺南廳)을 설치하고 관원을 배치하였다. 영남청에는 도제조 3명, 제조 3명, 낭청 1명이 배속되었다. 도제조 3명은 삼정승이 예겸하고, 제조 1명은 호조 판서가, 나머지 제조 2명은 기존 선혜청과 상평청을 겸관하던 제조들이 임명되었다. 낭청·서리·고직·사령·군사 등도 모두 상평청의 인원이 겸직하였다. 이처럼 기존 선혜청과 상평청의 관원들을 그대로 겸임시킨 것은 영남청을 운영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를 절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영남청에서는 1결당 13두를 부과하고, 봄과 가을에 각각 6두와 7두를 수세하는 ‘춘추분봉(春秋分捧)’의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이 중 봄의 수세분은 상납하고, 가을의 수세분은 경상도에 남겨 두었다. 당시 경기·충청·전라도의 수세액이 결당 12두로 통일된 상태에서 경상도만 1두를 추가 징수한 것은 대동세의 운반비를 감안한 조처였다. 이로써 남부 지역의 대동세는 결당 12두로 통일되었다. 조정은 1677년 경상도의 실결 156,906결을 토대로 수취한 135,985석 4두를 바탕으로 1년 예산을 편성하였다. 하지만 경상도의 대동세가 부족할 것을 대비하여 다른 도와는 달리 역리·역졸의 복호결도 수세실결에 포함시켰다. 역리·역졸의 복호결이 너무 많아 실결을 감축시켰기 때문이었다. 조정은 경상도의 역리·역졸의 복호결 11,008결에서 결당 2두씩 수취한 1,467석 11두를 저치미에 보용토록 하였다. 실결과 복호결에서 수세한 대동미는 총 137,452석 14두였다. 이 세액 중 38.6%에 해당되는 53,507석 13두를 중앙으로 상납하여 공물가로 지급하였고, 나머지 61.4%인 83,945석 1두는 도내에 남겨 두고 각종 수요에 대비하였다. 저치미 8만 3,945석 1두는 다시 경상비와 예비비로 나뉘는데, 경상비에는 5만 234석 5두, 예비비에는 3만 3,710석 11두를 각각 배분하였다. 저치미는 여미(餘米)라고 한다. 여미는 쇄마가, 상납미 운반비, 과외 별역 등을 위해 설정한 일종의 예비비라고 할 수 있다.

변천

대동세의 총액이 출세실결과 비례하는 구조에서 1679년(숙종 5)에 실시한 전결 답험과 그에 따라 증가한 출세실결은 영남대동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결답험이 끝난 그해 8월 이조 판서이원정(李元禎)의 발언을 계기로 역리와 역졸의 복호결에서 수취하던 2두의 대동미를 전면 폐지하였다. 1683년(숙종 9)에는 선유어사김재현(金載顯)의 서계와 영돈녕부사민유중(閔維重)의 주장으로 경상도의 대동세는 결당 12두로 줄어들었다. 아울러 같은 해인 1683년(숙종 9) ‘춘추분봉(春秋分捧)’은 수세 방식은 합봉(合捧)으로 전환되었고, 이는 『속대전』에 명문화되었다. 17세기 후반 경상도는 많은 양의 저치미를 통하여 안정적인 재정 운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어 대동세의 예산 편성에 변화가 생기면서 저치미 운영은 전과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전반부터 선혜청은 수조반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상납미의 비율을 늘리고, 저치미는 이전에 비하여 적게 책정하였다. 이는 선혜청이 재정 수지 구조의 악화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저치미의 감소는 그에 따른 지방 재정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 결과 18세기 전반 상납미와 저치미의 비율이 6:4로 역전되고, 18세기 중엽에는 7:3으로 책정되기도 하였다. 경상도 저치미가 급감하자 도내 지방군현은 재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조정은 2가지 방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첫째는 저치미 운영과 관련한 법적 조항을 강화하는 원론적인 방법이었다. 17세기에 비하여 저치미의 미봉(未捧)·천대(擅貸)·분급(分給)·범용(犯用) 등에 대한 처벌 규정을 대폭 강화화면서 수령의 부정행위를 근절하고자 하였다. 둘째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저치미의 수량을 보충해 주는 급대 방법이었다. 조정은 저치미의 급대 재원으로 환곡을 이용하였는데, 주로 상진곡이 활용되었다(『정조실록』 21년 9월 18일). 그러나 상진곡을 통한 급대정책은 신결미와 환미의 품질 차이, 잦은 저치미 운반에 수반되는 비용 부담, 상진청의 재원 감소 등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결국 저치미 운영의 총체적인 문제는 19세기 초반 별치미(別置米)가 설치되면서 해결되었다. 1806년(순조 6) 선혜청 당상박종경(朴宗慶)의 주도 아래 병인별치미(丙寅別置米)가 설치되었고, 이후 몇 차례의 합록을 통하여 총 180,000석의 환곡을 확보하였다. 병인별치미에 출자된 재원은 대부분 균역청과 상진청의 재원이었으나 환곡의 구관처는 선혜청으로 이관되었다. 따라서 병인별치미 신설 이후 선혜청은 매년 이자 곡식인 모조(耗條)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이 재원은 전액 경상도의 저치미로 충당하였다. 즉, 조정은 저치미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별치미라는 환곡을 신설하여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18,000석이라는 엄청난 모조도 결국 경상도민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점에서 별치미는 또 다른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운영되던 영남대동법은 1894년(고종 31) 세제개혁이 이루어질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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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탁지전부고(度支田賦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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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남대동사목(嶺南大同事目)』
  • 『영영사례(嶺營事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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