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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함경도 후주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후주부(厚州府)는 1822년(순조 22) 설치되어 1869년(고종 6)까지 함경도 후주 지방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기능하였다. 존속 기간은 함경도에 소속된 군현 가운데 가장 짧았고 1869년에 평안도로 이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발해 때에는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했다. 발해가 멸망한 뒤 유민 열만화(列萬華)가 압록강 유역의 이 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저항하였다.

고려 986년(고려 성종 5)에 거란에게 멸망된 뒤, 오랫동안 거란과 여진이 분산하여 거주하였다. 고려전기 북진정책으로 국토를 확장하였지만, 후주 지방은 확보하지 못하였다. 고려말 1361년(고려 공민왕 10) 지금의 강계 지역인 독로강(禿魯江)에 만호(萬戶)를 설치하여 압록강 중류 연안의 창성(昌城)·벽동(碧潼)·초산(楚山) 등이 수복되었지만, 이 지역은 여전히 야인의 활동 무대로 남았다.

조선이 건국한 뒤 태종 때 압록강 이남 지역이 모두 회복되고, 1413년(태종 13)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가 갑산군(甲山郡)으로 승격되면서, 갑산군은 갑산뿐 아니라 후주와 여연(閭延)·무창(茂昌) 등의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였다. 1416년(태종 16) 갑산군의 일부가 분리되어 여연군(閭延郡)이 설치되자, 후주와 무창은 여연군에 이속되고 상무로보(上無路堡)라 하였다. 1436년(세종 18) 만호를 두었다. 1440년(세종 22) 여연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무창현(茂昌縣)을 설치하였으며, 1442년(세종 24) 무창군(茂昌郡)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먼저 설치되었던 여연·자성(慈城)·우예(虞芮)와 함께 4군(四郡)을 이루었다. 4군은 지리적으로 동떨어져 방어와 주민 보호에 어려웠으므로 문종 때부터 철폐론이 제기되었다. 1455년(세조 1) 여연·무창·우예가 먼저 폐지된 뒤, 1459년(세조 5) 자성도 폐지되면서 이 지역은 폐사군(廢四郡)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다시 북방 영토의 개척이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고, 이는 후주진(厚州鎭)의 설치로 이어졌다. 1673년(현종 14)에는 함경감사남구만(南九萬)의 청에 따라 후주에 진을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하였고(『현종실록』 14년 12월 30일), 1674년(숙종 즉위)에 역시 감사남구만의 청에 따라 어면보(魚面堡)를 후주로 옮겨 설치하고, 만호이상식(李尙植)이 첨사(僉事)로 승진하였다(『숙종실록』 즉위년 10월 8일). 다시 1685년(숙종 11)에는 장진강 가에 어면진(魚面鎭)을 설치하여 후주의 군사와 백성을 소속시키고 후주진은 폐지하였다. 후주를 폐지한 것은 산삼을 캐는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가며 청(淸)나라와 마찰을 빚은 일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778년(정조 2) 폐사군을 복설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고(『정조실록』 2년 1월 13일), 1785년(정조 9) 이후로도 후주진의 복설 문제가 계속 제기되어(『정조실록』 9년 7월 14일) (『정조실록』 18년 7월 27일), 1796년(정조 20) 후주진을 다시 설치하였다(『정조실록』 20년 11월 19일). 1798년(정조 22)에는 후주진첨사의 명호(名號)를 독진방수장(獨鎭防守將)으로 새로 정하였다(『정조실록』 22년 7월 21일). 그 뒤 후주에 읍을 설치하는 문제가 다시 거론되어, 1822년(순조 22)에 고을로 승격시켜 후주부를 설치하였다(『순조실록』 22년 12월 23일).

조직 및 역할

도호부사(都護府使) 즉 부사(府使)는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종3품으로 규정되었다.

변천

1869년에 함경도의 관할 아래 있던 후주부가 평안도로 이속되면서, 무창부(武昌府)와 합병하고 읍호도 강등하여 후창군(厚昌郡)이라 하였다(『고종실록』 6년 10월 16일).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를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꿀 때 강계부(江界府) 소속의 후창군이 되었고(『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 다시 전국을 13도 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평안북도에 소속되었다(『고종실록』 33년 8월 4일).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방동인, 「4군 6진의 개척」, 『한국사 22-조선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