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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북부에 있으며 북쪽으로 대동강과 서해, 동쪽으로 황해도 안악, 남쪽으로 문화, 서쪽으로 은율과 접경하는 곳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장련현(長連縣)은 고려시대의 장명진(長命鎭)과 연풍장(連豊莊)을 합쳐 설치한 현이다. 1414년(태종 14)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조선말까지 읍격이나 명칭의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해주부 장련군이 되었고, 1914년에 은율에 병합되어 은율군 장련면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의 장명진과 연풍장이 합쳐져 장련(長連)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장명진은 황주 소속이었고, 연풍은 안악에 속하였으며, 1390년(고려 공양왕 2)부터 겸감무(兼監務)가 보임되었다. 『태종실록』에서는 1414년에 장연현(長淵縣)과 연풍현(連豊縣)을 합하여 장련현이 되었다고 하였다(『태종실록』 14년 12월 3일).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의 장연 및 장련 관련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고, 1396년(태조 5)에 장명진을 폐하고 연풍에 속하게 하였다가 1414년에 장련현이라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1414년에 장명과 연풍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장련현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조직 및 역할

현감은 무반 종6품관이 파견되었다. 좌수 1명, 별감 1명, 도감(都監) 1명, 군관 40명, 아전 23명, 지인 13명, 사령 20명, 관노 23명, 관비 30명이 있었다. 세종 때에는 군병으로 시위군 3명, 진군 31명, 선군 93명이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영조 때에는 병조 소속 군보(軍保)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중앙 군영 소속 군보가 있었다. 서해안 및 대동강 하구에 접한 곳이므로 중국 상인들과의 밀무역을 금지하기 위하여 읍치 북쪽의 대진관(大津關)에 권관(權管)과 급수군(給水軍)이 설치되었다.

변천

1895년에 전국 23부제 시행 때 해주부 장련군이 되었으며, 이듬해 황해도 장련군이 되었다. 1910년(순종 2)에 장련군이 폐지되고 인근의 은율군에 합속되어 은율군 장련면이 되었다(『순종실록』 2년 2월 4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장련현(長連縣)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장련(長連)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석화,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한국문화』38, 2006.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한국문화』38,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