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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8 기준 최신판



창덕궁 동북쪽 담장에 있는 집춘문 바깥의 성균관 왼쪽에 있었던 어영청의 분영.

개설

인조대에 설립된 어영청은 왕의 시위와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는 군영이었다. 어영청은 궁궐의 숙위를 훈련도감과 분담해서 거행하였다. 궁궐의 숙위는 궁궐 외곽의 담장을 전담하였다. 군영들에서는 여러 곳의 숙위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분영(分營)을 설치하였다. 창덕궁의 경우 훈련도감은 광지문 바깥에 광지영(廣智營), 어영청은 집춘문(集春門) 바깥에 집춘영(集春營)을 두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집춘영은 어영청이 창덕궁의 외곽 궁장(宮牆)의 경비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어영청은 1624년(인조 2)에 인조가 어영사(御營使)를 둔 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이귀(李貴)에게 군병들을 모집하게 한 데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어영청군은 왕의 친위병 성격으로 탄생한 것으로 이들이 궁궐의 경비를 담당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궁궐 외곽의 경비는 어영청만이 아니라 훈련도감과 금위영(禁衞營)에서도 담당하였으며, 해당 군영에서는 어영청의 집춘영과 같은 분영을 궁궐 주변에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집춘영은 창덕궁 동북쪽 바깥의 숙위를 담당하였다. 어영청의 초관(哨官) 1명과 군사 20명으로 시간대별로 나누어 궁궐의 외곽 담장을 순찰했다. 집춘영 인근에는 궁궐의 담장을 지키는 6개의 포(舖)가 있었다. 집춘영의 공해(公廨)는 16칸이었는데, 성균관 근처의 민가와 지붕이 서로 잇닿아 있었다(『정조실록』 20년 4월 12일).

1628년(인조 6)에 어영청 군병이 창덕궁 외곽 담장을 경비하는 규례를 정하였다. 4경에 집춘영의 초관이 입직군 20명을 인솔하고 두 바퀴를 순행(巡行)하고, 5경에 동영(東營)의 초관이 입직군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하게 했다. 1733년(영종 9)에는 새로운 순찰 규례를 정하였는데, 장교 1명과 군병 5명이 초경부터 날이 샐 때까지 순행하는 내용이었다. 그 밖에도 종묘 대문 동쪽에서 월근문(月覲門)까지는 초관 1명과 동영의 입직군 5명이 담당하고, 월근문 동쪽에서 집춘문 북쪽과 상수문(上水門)까지는 출신군관(出身軍官)·본청군관·별초(別抄) 가운데 1명이 번갈아 들면서 집춘영의 입직군 5명과 같이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변천

영조는 1733년(영조 9)에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삼영(三營)에서 궁장(宮墻)을 순찰할 때에 담당 지점을 정하여 순라(巡邏)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훈련도감에서는 집춘영에서 대보단(大報壇) 서쪽 담 모퉁이까지 이르고, 금위영에서는 종묘 대문 서쪽에서 대보단 서쪽 담 모퉁이까지 이르고, 어영청에서는 종묘 대문 동쪽에서 집춘영까지 순찰을 담당하였다(『영조실록』 9년 4월 19일). 집춘영에서 순찰을 담당한 군사들은 왕이 내린 표신을 확인한 후에 교대하였다.

정조는 즉위 초에 경희궁에서 암살의 위협을 겪은 뒤 궁궐의 숙위를 강화하면서 집춘영 등의 숙위 체제를 재조정했다. 먼저 1777년(정조 1)에 신변의 안전을 염려하여 궁궐 숙위군의 수비처를 바꾸었다. 훈련도감에서 경희궁 흥화문(興化門)의 군사 100명을 창덕궁 금호문(金虎門)으로 옮겨가게 하고, 원래 내입(內入)하던 군사 100명을 홍화문(弘化門)과 숭의문(崇義門)으로 가게 했으며, 훈련도감 출신 45명을 영숙문(永肅門)으로 옮겼다. 또 동영(東營)의 군사 50명을 집춘영으로 이동시켰으며, 서영(西營)의 군사 50명을 광지영으로 옮겨 들이고, 북일영(北一營)의 마병(馬兵) 50명을 남영(南營)으로 옮기고, 신영(新營)의 칠색군(七色軍) 40명을 북영으로 이동하였다(『정조실록』 1년 8월 6일). 1778년(정조 2)에는 집춘영·광지영·동영·서영에 입직하는 군병 중에서 어영청 소속이 200명, 훈련도감과 금위영 소속이 각각 100명이었는데, 이들을 나누어 파수할 때에는 어영청군은 해당되지 않았다. 정조는 파수를 분배할 때에 어영청군이 집춘영을 포함해서 균등하게 숙위에 참여하도록 조정했다. 1780년(정조 4)에 왕이 도성 밖으로 행행할 때에는 집춘영에 입직하는 어영청 군병을 10명만 남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행행의 호위군으로 동원하였다.

정조는 집춘영 군병들의 군용(軍容)을 직접 점검하기도 했다. 1782년(정조 6) 2월에 집춘영 인근인 춘당대에 임어하면서 어영청의 교련관(敎鍊官) 전원, 집춘영과 동영에 입직한 군사를 모두 대령하게 했다. 정조 앞에서 집춘영 군인들은 진(陣)을 배열하고 대오를 정돈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집춘영의 군사를 수어청의 군사로 바꾸었다. 정조는 장용영의 군사는 홍화문에 직숙하고, 훈련도감의 군사는 서영과 광지영에, 금호문에 추가로 들여보낸 군사는 동룡문(銅龍門)에, 총융청의 군사는 동영에, 수어청의 군사는 집춘영에 직숙하게 하여 금위영과 어영청 두 군영의 향군(鄕軍)이 번서는 것을 정지시키고 이를 대체하게 하였다(『정조실록』 18년 11월 4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전통편(大典通編)』
  • 『금위영등록(禁衛營謄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 『만기요람(萬機要覽)』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김종수, 『조선후기 중앙군제 연구』, 혜안, 2003.
  • 원영환, 「朝鮮 後期 都城修築과 守備에 대하여」, 『향토서울』33, 1975.
  • 윤훈표, 「조선후기 동궐의 숙위 체계의 변화」, 『서울학연구』30, 2008.
  •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幸行時 궁궐의 宿衛와 留都軍 연구」, 『군사』62, 2007.
  • 차문섭, 「朝鮮後期 中央軍制 再編과 首都防衛」, 『朝鮮時代 軍事關係硏究』, 단국대학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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